싱그러운 나무 열매들의 꽃향기가 바람을 타고 흩날리며 수확철을 맞아 노피카님의 은총이 기대될 무렵, 모험가로 보이는 외지인 하나가 검은 장막 숲속 그리다니아를 찾았다. 그 날 광장의 거대 에텔라이트는 평소보다 더 밝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를 처음 본 것은 그리다니아의 재벌 파파존이 시킨 열매 나무들의 잔가지를 치는 노동을 끝내고 그리다니아의 종합상사인 흑토당의 직원 니니푸와 카라인 캐노피 카페에서 명물 요리 라노시아 토스트와 오렌지 쥬스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그리다니아는 평화스럽게 보이는 마을이지만 모두 조금 불안한 마음을 가진 채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어, 영재의 후유증도 그 중 하나야."
카라인 카페 점장인 뮤느는 오늘 찾아온 모험가에게 설명을 해주고 있었다. 뮤느는 그리다니아가 휴런과 엘레젠이 합쳐지기 전부터 카페 일을 했었는데 반은 자의로, 반은 정령 중계자 환술황이자 그랜드 컴퍼니 쌍사당의 당수 카느 에 센나에 의해 모험가 길드도 카페와 함께 운영중이다. 그렇기에 그리다니아에서 유일하게 먹고 마실 수 있는 카라인 카페에서는 잠시 들렸다가는 다양한 모험가들을 볼 수 있다. 보통은 짧게 대화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오늘 뮤느는 누가봐도 격양된 모습으로 쉴 새 없이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라노시아 토스트를 다 먹고 오렌지 쥬스를 다 마실 때까지 뮤느는 대화를 끝내지 않았다.
"우리들은, 너희들 모험가의 힘을 필요로 하고 있어, 그리다니아에 사는 모두의 불안을 떨쳐내기 위해, ''빛의 전사들''처럼 되어 주기를 기대하면서 말이야. 부디, 너의 힘을 빌려줬으면 해. 그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그렇지만, 우리들은 모험가에게 협력을 아끼지 않을거야."
그러다가 뮤느는 헛기침을 흠흠하고는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배시시 웃고 말했다.
"... 이런, 꽤나 서론이 길었네, 그럼 모험가 등록을 하도록 하자. 여기에 사인해줄래?"
그러자 그는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자신과 상관없는 이야기를 저렇게까지 오래 들어버리면 보통은 질릴거라 생각하는데 아무래도 이번 모험가는 달랐나보다. 뮤느의 이야기를 끝까지 경청하고 모험가 등록 서류도 두 손으로 정중히 받아 자신의 이름을 써내려가고 펜도 깔끔하게 수직으로 눕혀 뮤느에게 건냈다. 깐깐한 성격으로 보이는 모험가는 뮤느에게 자잘한 주의사항을 듣고는 카라인 카페를 나갔다. 그를 바라보며 흐른 땀을 손수건으로 닦아내고 있는 뮤느를 보고 있자니 카라인 카페 벽에 걸린 스테인드 글라스에서 환한 빛이 쏟아져 카라인 카페를 형형색색으로 물들였다.
"와... 니니푸, 오늘 달빛이 참 밝네, 카라인 카페 스테인드 글라스가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어."
"뭐? 무슨 소리야? 쥬스 마시고 취했어?"
그 말에 라라펠 소녀는 한번 눈을 깜박이자 카라인 카페를 물들였던 스테인드 글라스 빛이 어느새 사라진걸 알아챘다. 정말 쥬스를 마시고 취했나 싶은 소녀는 고개를 흔들며 있지도 않은 취기를 날리기 위해 애썼다.
"아니야, 그나저나 내일 파파존 일을 마무리 해야 되, 슬슬 일어나자."
"그래, 흑토당도 요새 갑자기 바빠지기 시작해서 나도 시간이 좀 없어."
며칠 뒤 평상시라면 마을 여자에게 수작을 부리거나 카라인 카페에서 근무시간 내내 농땡이를 피우고 있을 귀곡부대가 걸어다니는 것조차 못 볼정도로 달음박질을 하며 그리다니아를 뛰어다니거나 그라다니아 밖으로 나가고는 했다. 물어봐도 제대로 대답해주는 귀곡부대원이 없었고 마을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이야기밖에 없었다. 이크살족과의 싸움보다도 더 분주한게 그리다니아의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공포심에 사로 잡혀 평상시보다 더욱 더 불안한 마음뿐이었다. 모두 역사를 기억하기 때문에 번영의 시대가 또 다시 끝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앞섰다.
그건 라라펠 소녀도 마찬가지었다. 소녀는 파파존이 부탁했던 일도 끝나고 마땅한 일이 없어 원예가 길드 접수원인 레온소에게 부탁해 농작물의 벌레를 잡는 일을 하고 있었다. 눈 앞에서 귀곡부대원들이 뛰어다니니 흩날리는 먼지에 숨이 막히고 눈이 아파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피곤함과 불안한 마음이 합쳐져 결국 원예도구를 던져버리고는 제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러자 푹하는 소리와 함께 텃밭에 뿌려져 있던 거름이 소녀의 작업복에 묻었다.
"에이 씨..."
소녀는 거름을 털어내려 다시 일어서자 저 멀리 그리다니아로 들어오는 귀곡부대원들이 보였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그리다니아에서 나가는 귀곡부대원들만 봤다가 드디어 들어오는 부대원을 보니 반가운 마음과 함께 무슨 일이 일어났던건지 궁금증이 늘어 작업복을 터는 것도 잊은 체 가도로 향했다. 그러자 들 것에 실려오는 귀곡부대원들이 보였다. 한두명이 아닌 수십명이 들 것에 실려서 그리다니아로 오는 풍경은 마치 전쟁을 연상하게 했고 제 8 재해가 오는 것이 아닌지 덜컥 겁이 났다.
"도대체 무슨 일이..."
"제 7 영재가 막바지에 이르게 된거야... 무서워..."
들 것에 실려오는 귀곡부대원을 본 사람들은 하던 일도 멈춘 체 불안해했고 어떤 이는 주저 앉아 울기까지 했다. 라라펠 소녀 역시 마찬가지로 무서웠으나 가장 무서웠던 것은 그리다니아에 있었던 마을 사람들이 아니라 무슨 일인지 몰라도 나가서 맞서 싸웠던 귀곡부대원들일거라 생각하고 작업용 장갑을 벗고는 석로수명상굴*1, 그리다니아 환술사 길드로 급히 향했다. 환술사 길드는 평상시와 달리 한산했다. 돌아다니지 않는 걸로 유명한 환술사 길드장 에 스미 얀은 자리에 없었고 접수원인 마델을 제외하고는 몇 안되는 환술사들이 명상을 하고 있었다. 소녀는 달음박질로 인한 가벼운 현기증을 숨고르는 것으로 사라지게 하고는 입을 열었다.
"마델! 큰 일 났어!"
"그 모습보다 더 큰 일이야?"
그 말에 소녀는 아직도 작업복에 붙어있는 거름을 보고는 자신의 상태를 그제서야 알았고 털어내려 했으나 작업용 장갑이 아닌 맨손이었던 소녀는 시무룩 귀가 쳐졌다. 그것도 잠시, 자신이 환술사 길드에 온 이유가 생각나 고개를 흔들어 정신차리고 마델에게 이야기했다.
"귀곡부대원 부상자가 밀려 들어오고 있어! 환술사들이 필요해!"
"어?... 에 스미 얀님도 가셨는데 어째서..."
마델이 눈을 가늘게 뜨며 생각에 잠기자 소녀는 접수대를 맨손으로 내려치며 마델을 쏘아봤다. 쿵하는 소리에 안쪽에서 명상을 하던 환술사들이 놀라 접수대를 처다봤다.
"생각할 시간이 없어! 마델!"
"아, 알았어. 일단 보내도록 할게."
마델이 대답을 다하기도 전에 몇몇 환술사들이 이미 접수대 앞에 있었고 그들에게 구시가지, 신시가지의 각각 시설로 향하라고 지시한 뒤 안쪽에서 아직도 명상중인 환술사들을 정신차리게 해 대부분의 환술사들이 석로수명상굴에서 나가게 했다. 그리고는 한숨을 내쉬며 손에 나뭇가지를 들고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마델은?"
"난 접수원이니까 자리를 비우면 안돼, 그런데 너 혹시... 이거 잠깐 들어볼래?"
소녀는 마델이 든 나뭇가지를 보고는 무슨 소리인지 이해를 하지 못해 멀뚱멀뚱 마델을 처다보며 동그란 눈망울만 깜박거렸다. 그러자 마델은 소녀의 손을 감싸더니 나뭇가지를 손에 쥐어주었다. 그러자 소녀는 점점 손이 뜨거워지더니 지끈거리는 두통과 함께 눈을 질끈 감았다.
''듣고 ... 느끼고 ... 생각하세요''
생전 처음 듣는 소리와 함께 소녀의 시야에서는 짤막한 영상들이 스쳐지나갔다. 황색 거인이 땅을 내려찍자 대지가 요동치는 영상이, 팔이 날개로 된 여자가 날아다니며 돌풍으로 바위들을 날려버리는 영상이, 거대한 도마뱀이 대지를 불태우는 영상이, 마지막으로 검은 망토를 입고 붉은 가면을 쓴 자가 웃는 모습이 보였다. 고개를 흔들자 두통이 사라지고 시야가 돌아왔다. 소녀의 시야가 돌아오자 가장 먼저 본 것은 손에 든 나뭇가지에 명상굴 전부를 밝힐 정도의 강렬한 빛이 맴돌고 있는 장면이었다. 소녀가 놀라 "꺅" 하고는 나뭇가지를 놓자 빛이 있었던 것 자체가 허상이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정령들이... 먼저 반응했어?"
마델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지 입을 벌린 체로 소녀의 손을 꼭 잡고는 한손에는 떨어진 나뭇가지를 다시 주워들었다. 그리고는 명상굴 밖으로 소녀를 이끌었다. 마델의 갑작스러운 손아귀 힘에 농사일로 다져진 소녀도 비틀거리며 저항하지 못하고 이끌려갔다.
"자, 잠깐! 마델! 접수원이 나가면 어떻게 해!"
"지금부터 너도 환술사야! 부상자를 도와주기 위해 가야한다고!"
"뭐? 농담하지마!"
마델은 소녀를 이끌던 손을 놓고는 다시 소녀에게 나뭇가지를 쥐어줬다. 소녀는 방금전의 생각이 나 나뭇가지를 내치려고 했으나 그것보다도 마델의 몰아붙이는 윽박이 더 빨랐다.
"외쳐봐! 케알!"
"케.. 뭐?"
"빨리! 케알!"
"케...알?"
그러자 소녀의 나뭇가지에서 빛구슬들이 모여들었고 그 빛구슬들은 마델의 몸을 이리저리 살펴보듯이 돌아다니더니 이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본 마델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강제로 소녀를 이끌며 부상자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 뒤로 소녀는 무슨 일을 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평생 이렇게까지 정신이 없어본 적은 없을 정도로 바빴고 새로운 일들뿐이었다. 쉴 새 없이 몰려드는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도중 마나라는 것이 모두 떨어져 정말로 정신을 잠깐 잃었고 일이 끝나자 정식으로 에 스미 얀이 소녀에게 정령 사례식까지 해주었다. 자신의 힘으로 사람을 구했다는 뿌듯함도 느꼈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는 그 기분이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바로 일터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로 레온소에게 된통 깨졌기 때문이다. 몸과 정신이 모두 피폐해진 소녀는 원예가 길드를 터덜터덜 걸어나와 텃밭 울타리에 걸터앉았다.
소녀가 한숨을 내쉬고 하늘을 바라보자 평상시보다 밝은 에텔라이트와 밝은 밤하늘은 술을 마시지 않더라도 에텔에 취하게 만들 정도로 분위기가 있었다. 소녀는 에텔에 취하듯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피곤한 몸을 떠다니는 바람에 기대어 분위기에 취해 눈을 감았다. 그러자 사박거리는 소리도 없이 누군가 다가와 갑자기 소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평상시에는 당혹스러워 짤막한 비명이라도 질렀을텐데 정말로 에텔에 취했는지 소녀는 그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개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거기에는 며칠전 카라인 카페에서 본 모험가가 서있었다. 분명 초면일텐데도 어딘가 그리우면서 따뜻한 느낌이 나는 휴런 남성으로 그는 온 몸을 중갑으로 감싸고 투구 사이로 보이는 짙은 아이라인과 밝게 빛나면서도 속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눈망울이 보였다.
"당신이 세유유 세유입니까?"
"네, 맞는데요..."
"갑작스레 실례했습니다. 저는 크라이브 타너, 모험가입니다. 에 스미 얀님과 카느 에 센나님의 추천으로 환술사 세유유 세유님을 인계받았습니다. 내일 바로 함께 모험을 떠나려 하는데 세유유 세유님께서는 괜찮으십니까?"
"아... 음, 뭐... 네. 그럴게요."
"그럼 내일 뵙기로 하겠습니다."
크라이브 타너는 짤막하게 이야기하고는 작은 에텔라이트를 만지더니 어느새 사라졌다.
크라이브가 사라진 장소를 멍하니 바라보던 세유유가 에텔에서 깨어나 그 제안을 허락한 자신에게 놀라는 것은 그리 오래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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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석로수명상굴은 환술사 길드가 자리를 잡고 있는 곳으로 그리다니아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나무의 안쪽 굴처럼 파여 있는 곳이며 보통 사람이라면 들리지 않는 정령의 속삭임을 듣기 위한 환술사들의 수행장소이다.
석로수명상굴 이 외의 단어에도 주석을 달아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중입니다. 아직 오픈도 안한 게임이면서 고유명사는 정말 많고 정립된 세계관이 너무 방대해서 파판14를 하지 않은 분께서 이 SS를 이해하시기에는 힘들거라 생각합니다. 게다가 프롤로그이면서도 시간대시점이 그리다니아 14레벨 메인퀘스트 ''거목에서 꿈틀대는 어둠''을 클리어한 이후라 클베때 잠깐 해보시고 모래의 집에도 못가셨던 분들은 더더욱 이해하기 힘들 것 같네요... 현재 플롯은 세유유가 학자로 전직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PS1. 처음에는 플롯을 알라 미고의 갈레말 제국병으로 정하려했으나 쓰다보니 현재보다 몰입도 있는 소설은 되지만 고유명사부분이 더 심각해져서 편안한 소설쪽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PS2. 최대한 한국 번역 및 설정을 파괴하지 않기 위해 검수하고 검수한 자료들을 사용했습니다. (NPC 이름을 제외한 주연들 이름들도 모두 종족, 부족별로 명명하는 방식을 채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