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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전사들 - 외전 카르테노 전투가 남긴 것 (라하편)

번호 118
15-08-13 23:42 조회 7312


붉은 머리칼의 소녀는 눈이 새하얗게 감싸 안은 석판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열살 정도 되어 보이는 자그마한 몸은 검은색 두꺼운 도도코트에 푹 파묻힌 채였다. 목 주위에는 실프 가운을 두르고 두 손도 두 발도 모두 꽁꽁 감추어, 흰 살결이 드러난 곳은 홍조를 띄운 얼굴과 머리 위로 솟아난 두 귀뿐이었다. 소녀는 장갑 끝으로 차가워진 귀를 문지르다가 소녀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오는 남자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새하얀 입김이 그의 모습을 가리자 소녀는 눈을 감았다.

"또 오신거에요."
"그래, 여기는 누구나 올 수 있는 장소지."

소녀가 기지개를 피듯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러자 거기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각각의 비석 앞에 서 있었다. 누군가는 비석을 끌어안고 울고 있었으며 누군가는 말없이 비석만 바라보고 있었으며 누군가는 비석과 대화를 하듯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소녀는 감았던 눈을 떴다. 숨어있던 눈망울은 빛을 잃어 아무것도 바라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매일 저를 찾아오지 마세요."
"너처럼 어린 미코테가 매일매일 자기 부모의 비석을 깔고 앉아있다면 이유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지."

남자는 그러고는 가방 속에서 음식을 꺼내 소녀 비석 앞에 놓았다. 거기에는 다른 이들의 비석과 달리 많은 음식이 있었는데 그 중 절반은 썩거나 부패해있고 그로 인해 벌레들의 시체가 들끓었고 나머지 절반에는 눈이 쌓여 음식인지 눈덩이인지도 분간이 가질 않았다.

"전 먹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어요. 이런 때에 낭비를 하지 마세요."
"그렇다면 다른 사람이 치우지도 못하도록 하는건 왜지?"

소녀는 고개를 다시 내리고 도도코트에 얼굴을 파묻었다. 축 처진 머리위의 귀가 대신 대답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남자는 한숨을 내쉬고는 어린 미코테의 머리에 손을 올리고 쓰다듬었다.

"네가 지금 입고 있는 도도코트도, 장갑도 모두 나처럼 너를 그냥 지나치지 못한 사람들의 배려다. 다른 이의 배려를 받아들이는 네가, 부모의 배려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구나."

그 말에 소녀는 고개를 휙하고 흔들며 남자의 손을 치우고는 달려들을 듯이 매섭게 그를 노려보았다.

"니가! 니가 뭘 알아! 이 새끼들때문에 내가... 내가!"

소녀는 참지 못하고 품속에 단검을 꺼내며 남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오랜시간 앉아있었던 것으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민첩한 움직임이었다. 주위에서도 깜짝 놀라 다가오려 했으나 그 전에 남자는 두꺼운 장갑을 낀 손으로 잽싸게 단검의 날을 잡았다. 단검의 날은 검이란 말이 무색하게도 무뎌지고 무뎌져 베는 것은 커녕 판자에 표식을 남기는 것조차 힘들 것처럼 보였다. 남자가 단검을 잡자 소녀는 끙끙거리며 두 손으로 단검을 찌르거나 빼려고 힘을 주었으나 남자의 손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얼마안가 소녀가 땀을 비오듯 흘리며 숨을 몰아쉬고 입김을 뿜어내자 남자는 입을 열었다.

"너의 아버지로부터 널 돌봐달라는 부탁을 들었다. 난 그저 전우로서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야할 뿐이야. 그리고 널 설득하기 위해 묘비에서만 있는 널 보고 찾아온지 지금까지 1년째다. 넌 지금까지 거울이라도 한번 본 적이 있나?"

그러자 소녀는 숨을 몰아쉬며 한손으로 흘러내리는 도도코트를 추스리려고 했으나 들기에는 너무 무거운 도도코트가 흘러떨어졌고 뼈만 남은 말라깽이 모습의 소녀가 보여 서있는 것조차 믿기 힘들 정도였다. 그러나 투기만큼은 살아 숨쉬고 있어 소녀가 말랐다는 것은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 누구도 믿지 않을 정도로 생기가 넘처흘렀다.

"네가 먹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여기까지가 너의 한계일거야. 에테르에 너무 의존하다가는 에테르에 먹히게 된다. 지금 당장이라도 영양가 있는 식사가 필요해."
"하? 안먹고 1년 넘게 살았다는 게 앞으로도 살 수 있다는 증거다!"

소녀는 분을 못 삮히고 단점을 부여잡고 남자를 발로 차다가 눈발에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남자는 소녀의 단검을 품속에 넣고 소녀의 허리춤을 잡고는 어깨에 짊어맸다. 소녀는 벗어나려 발버둥처보기도 했고 남자의 얼굴에 주먹질도 하고 꼬집어보기도 했으나 남자는 묵묵부답으로 천천히 비석의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기만 했다.

"씨발! 놔! 놓으라고! 놔! 놔!!! 아아아악!"

점점 멀어지는 비석을 보며 소녀는 손을 뻗으며 끝내는 미친듯이 악을 썼으나 남자는 발버둥치는 소녀를 부여잡고 묵묵히 걸어갔다. 묘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소녀는 방금 전 악을 쓴 것이 거짓인 것처럼 느껴질만큼 조용히 고개를 떨구었다. 얼마 안가 남자는 오두막으로 들어갔고 오두막에는 벽난로가 탁탁 장작개비타는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빨갛게 타오르는 불로 오두막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었다. 탁자에는 이미 준비되있던 김이 올라오는 따뜻한 도도 스튜가 두 그릇 있었고 탁자 옆에 서있는 여성은 웃으며 남자를 맞이했다. 남자는 소녀를 강제로 스튜 앞에 앉히고는 맞은 편에 앉아서 스튜를 떠먹자 적당히 잘 익은 도도 고기향이 탁자에 퍼졌다.

"너의 부모님들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갈레만 제국에 저항하셨다. 네가 어떻게 키워졌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네 녀석의 부모님만큼은 긍지 높은 태양의 추종자셨다."

남자는 품속에 있던 단검을 꺼내 소녀가 잡을 수 있도록 스튜 그릇 옆에 꺼내놓았다. 그러자 소녀가 고개를 들어 단검을 바라보았다.

"넌 어떻지?"
"나... 난..."

소녀는 단검을 가로채듯이 들고는 탁자에 내리쳤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푸른색으로 빛나는 검신의 단검이 언제 무뎠었냐는 듯 탁자 깊숙히 박혀 탁자에 큰 구멍을 만들었다.

"난, 긍지 높은 태양의 추종자 시 모크리 라하다!"

고개를 든 소녀에 눈망울에서는 쉴 세 없이 닭똥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날 소녀가 허겁지겁 먹었던 도도 스튜는 혀가 아릴 정도로 짰다.

 

 

 

 

 

외전 바데론과 라하의 만남입니다. 14일부터 쭉 놀려고 일 몰아서 해서 소설 쓸 시간이 없었네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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