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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승리호'

처음 그를 만난 것은 열두 살 때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열일곱. 나이 차이는 고작 다섯 살밖에 나지 않았지만 아직 어린 소녀였던 '아실리아'의 눈에는 '산크레드'가 무척 어른스럽게 보였다. 제6성력 1562년, 아실리아는 제국군의 이중첩자였던 아버지를 따라 사막도시 '울다하'에 왔다. 하지만 이때 '사고'로 아버지를 잃고 낯선 땅에서 고아가 된 그녀가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엄마'가 되어주겠다고 나서준 미코테족 여성 '프라민'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 '사고' 당시 우연히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산크레드 또한 그녀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제국군에게 쫓기지 않도록 가명을 쓰라고 권해준 것도 산크레드였다. 그는 떠돌이 음유시인이었기에 늘 곁에 있어 준 것은 아니었지만, 일이 있어 울다하에 들를 때면 거의 빠짐없이 그녀가 잘 지내는지 보러 와 주었다. '민필리아! 조금 늦긴 했지만 생일선물을 가져왔어'

그런 '오빠'에게 한 통의 편지를 건네 받은 것은 '민필리아'라는 새 이름에도 완전히 익숙해졌을 무렵이었다. 그녀는 이제 열여덟 살이 되었다. 생일선물이라며 가져온 미스릴 단검과 함께 건네 받은 그 편지가 그녀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편지를 보낸 사람의 이름은 '루이수아 르베유르'.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기에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우아한 필기체로 적힌 서명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꼈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 편지를 쓴 건 내 은인이야. 림사 로민사에서 망나니처럼 지내던 나를 데려다 제대로 살아가는 법을 알려준 사람이지' '제대로 살아가는 법이요? 가는 곳마다 여자를 꼬시고 다니는 떠돌이 음유시인 생활이 제대로 살아가는 법인 줄은 미처 몰랐네요' 민필리아가 비아냥거리자 산크레드는 어깨를 으쓱하며 일단 편지부터 읽어보라고 재촉했다. 할 수 없이 봉투를 열고 편지를 읽기 시작한 민필리아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첫 구절에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과거를 본 적이 있다고 들었네』 민필리아는 분명 딱 작년 이맘때쯤부터 가끔씩 '환시'를 보고는 했다. 환상처럼 느닷없이 나타나는 옛날 일들. 그리고 어딘가로 인도하듯 속삭이는 별의 목소리……. 지금껏 자신을 돌봐준 어머니가 걱정할까 봐 프라민에게는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지난번 이 수수께끼의 '오빠'를 만났을 때 살짝 이야기를 꺼냈던 것이다. '산크레드! 설마 그 얘기를 다른 사람에게 한 거예요!?' 민필리아는 비밀을 너무도 쉽게 말해버린 산크레드에게 화가 났다. 그러나 그는 평소와 달리 몹시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정말 미안해, 민필리아. 하지만 우리 스승님은 샬레이안에서도 제일 이름난 현자야……. 이런 일엔 전문가나 다름없어. 그러니까 조금만 진정하고 편지를 끝까지 읽어줄래?'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산크레드의 판단이 옳았다. 민필리아는 현자 루이수아가 보낸 편지 덕분에 자신에게 생긴 특별한 능력이 '초월하는 힘'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리고 옛 기록에 '재해'가 눈앞에 닥쳐왔을 때 반드시 '초월하는 힘'을 가진 자가 나타난다고 쓰여있다는 사실도. 대홍수가 일어났던 '제6재해' 당시 사람들을 구했던 '열두 현자'나 그보다 더 오랜 옛날의 영웅들도 마찬가지로 능력자들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오래된 문서에 적혀 있다고 해서 모두 다 진실인 것은 아니다. 때론 이야기가 과장되거나 뒤바뀌고, 왜곡될 수도 있다. 그러나 루이수아는 '초월하는 힘' 중 하나로 '과거시'에 대한 내용도 적혀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산크레드, 진심이에요?' 편지를 다 읽은 민필리아가 산크레드에게 물었다.

'당연하지, 민필리아. 나도 스승님도 진심으로 믿고 있어. 네가 가진 '초월하는 힘'이 세상을 재해에서 구할 열쇠가 될 거라고 말이야' 그리고 산크레드는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자신이 루이수아가 만든 '구세시맹'이라는 조직에 속해있다는 것과 갈레말 제국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에오르제아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도 말이다……. 더욱이 '사고'가 일어났을 때도 비밀 임무를 수행하러 울다하에 왔던 것이라는 말을 듣고 그녀는 깜짝 놀랐다. '물론 너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해서 세상을 구하라고 명령할 생각은 없어. 단지, 그 힘이 뭔지 깨닫고 어떻게 사용할지를 진지하게 고민해보길 바랄 뿐이야.' 이 일을 계기로 민필리아는 현자 루이수아와 편지를 주고받게 되었다. 그러면서 옛 문헌을 해독하여 '초월하는 힘'이 무엇인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거듭 고민했다. 그리고 민필리아가 내린 결론은 자신과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모아 그 힘을 올바르게 사용할 방법을 찾기 위한 조직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러한 생각을 루이수아에게 전하자 그는 반가워했다. 다만 한 가지 충고를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람은 자신과 다른 힘을 가진 자를 본능적으로 두려워하여 배척하려 드는 법이네. 능력자를 모을 때는 부디 사람들이 두려워하게 만들지 말게나』 민필리아는 현자의 조언에 따랐다. 그래서 자신이 세운 조직을 겉으로는 '에오르제아 열두 신의 기적을 조사하는 모임’으로 꾸며서 어디든 있을 법한 종교 단체로 보이게 했던 것이다. '열두 기적 조사회'는 그렇게 탄생했다. 이때 민필리아는 스무 살이었다. 아직 많이 서투르고 어렸지만 루이수아와 '구세시맹'의 현자들이 여러모로 뒤에서 힘써준 덕분에 이제 갓 출발한 조직치고는 순조롭게 나아갈 수 있었다. 뛰어난 인재들이 모이자 하나 둘 능력자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차근차근 활동을 시작했다. 시간은 흘러 제6성력 1572년이 되었다. 갈레말 제국 장군 넬 반 다르누스가 꾸민 '메테오 계획'이 드러나며 곧 제7재해가 닥칠 것이란 말이 나오던 무렵이었다. 민필리아는 마침내 고대하던 대로 루이수아와 직접 만날 수 있었다. 에오르제아 각 도시의 지도자들과 회합이 있어 울다하에 들른 루이수아가 그 당시 도시 안에 있던 '모래의 집'을 찾은 것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하고 인사하면 좀 이상한가요, 루이수아 님' '살짝 어색하긴 하군' 그렇게 말하며 빙그레 웃는 루이수아는 현자라기보다는 손녀와 만난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 같았다. 하지만 루이수아가 꺼낸 것은 너무나도 무거운 이야기였다. 달의 위성 '달라가브'가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에오르제아 열두 신'을 불러내는 '소환 의식'을 행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야만신 소환만큼이나 금기시된 비술이며, 최악의 경우 에오르제아 사람 모두가 열두 신의 '신도'가 될 위험이 있었다. 그런 사태를 막을 방법은 단 한 가지였다. 열두 신이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게 막고, 그 힘만을 끌어내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소환자인 루이수아 자신이 도중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 열두 신이 야만신으로 바뀌는 것을 막고 다시는 '소환의식'을 행하지 못하도록 한다……. 그야말로 '죽음을 각오'한 것이다.

'그럴 수가! 다른 방법은 없는 건가요!?' 어떻게든 다른 길을 찾아보려는 민필리아에게 루이수아는 나지막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혹시 이 늙은이를 걱정해주는 거라면 대신 부탁 하나만 들어주지 않겠나?' 루이수아는 자신이 죽고 나면 맹주를 잃게 될 '구세시맹'과 '열두 기적 조사회'를 합쳐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달라고 했다. 그가 민필리아에게 부탁한 것은 훗날 '새벽의 혈맹'이 될 새 조직에 대한 계획이었다. '잠깐만요, 전 루이수아 님 대신에 이렇게 큰 일을 감당할 수 없어요! 무슨 수로 혼자 견디란 말인가요!' 이 당시 루이수아가 죽음을 각오한 채 카르테노 평원으로 향하는 것을 알았던 사람은 오로지 민필리아 뿐이었다. 만약 '구세시맹' 현자들이 알면 자신을 말릴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힘든 일을 떠맡겨서 미안하지만 부디 이해해주게. 허나 혼자는 아니라네. 언젠가 분명 자네를 도울 자가 나타날 게야. 자네처럼 '초월하는 힘'을 가진 자가 빛의 의지에 이끌려 찾아올 걸세. 그러니 결코 희망을 버리지 말게나. 아무리 어두운 밤이라도 반드시 해는 뜨고 새벽을 맞이하게 될 테니까……' 루이수아는 민필리아의 손을 꼭 잡은 채 간곡히 부탁했다. 그리고 며칠 뒤, 현자 루이수아는 에오르제아 동맹군과 함께 '카르테노 전투'에 나섰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제7재해를 겪고 난 후 산크레드와 다시 만난 민필리아는 그에게 부탁하여 '구세시맹'의 현자들을 불러모아 루이수아가 부탁했던 계획을 밝혔다. 이들은 모두 그 뜻에 함께해주기로 하였다. '새벽의 혈맹…… 이게 바로 우리의 새 조직 이름이에요' 그때부터 5년 동안 민필리아는 '새벽의 혈맹'의 맹주로서 달려왔다. 에오르제아를 구하려 했던 루이수아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그리고 그날 루이수아가 했던 말이 현실이 된 것이다. 민필리아, 스물일곱 살. 지금 그녀의 눈앞에는 다시 찾아온 '빛의 전사'가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