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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천의 이슈가르드

못다 한 이야기

파이널판타지14: 창천의 이슈가르드편에 등장한 인물들의 뜻밖의 만남, 그리고 스토리에서 미처 말하지 못했던 마음을 담은 특별한 이야기를 공개합니다.

'여왕 폐하의 두 번째 선서'

그 일의 전말을 들은 것은 눈을 뜨고 사흘이 지난 뒤였다. 왕실 경호를 맡아 나나모를 어린 시절부터 지켜왔으며 은퇴한 뒤로도 보살펴준 근위기사 출신 파파샨에게 지금껏 일어난 사건에 대해 보고받은 것이다. 나나모는 크나큰 충격에 빠졌다. 라우반이 왼팔을 잃은 것과 빛의 전사를 필두로 한 '새벽의 혈맹'이 겪은 일을 듣자 분노에 휩싸인 나머지 로로리토를 처단하라고 불같이 화를 낼 정도였다. 그러나 파파샨은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말했다. '우선 로로리토 공이 무슨 꿍꿍이인지 알아보십시오. 뭐든 서둘러서 좋을 것은 없습니다' 얼마 후, 울다하 왕궁 '향불방'으로 세 사람이 초대되었다. 사건의 중심인물 '로로리토 나나리토', 불멸대 국장 '라우반 알딘', 날달 교단 대주교 '듀라라 듀라'까지 모두 모래전갈회에 속한 주요 인사들이었다. 공화파, 왕당파, 중립파에서 각각 한 사람씩 뽑힌 셈이다. '변명할 기회…… 를 주셨다고 생각해도 괜찮겠습니까?' 로로리토는 뻔뻔하게 말문을 열었다. '……할 말이 있다면 어디 한번 해보도록 하여라' 나나모는 가능한 한 침착해 보이기를 바라며 맞받아쳤다. '뭐, 그러시다면야' 하고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로로리토는 서서히 가면을 벗었다. 애당초 이렇게 여왕을 알현하는 자리에 가면을 쓰고 있는 것 자체가 무례한 행동이었으나, 절대적 권력을 가진 로로리토는 지금껏 '강한 빛은 눈을 상하게 한다'는 이유로 결코 맨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데 비로소 그 가면을 벗은 것이다.

'솔직히 말씀 드려, 나나모 폐하는 울다하에 닥친 위기를 너무 만만하게 보십니다' 나이 든 상인은 금빛 눈동자로 여왕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변명을 늘어놓는 척하며 여왕을 비판하는 모습에 라우반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자리가 자리인 만큼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나나모도 이것을 눈치챘으나 로로리토가 계속 말을 이어가도록 놔두었다.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나서 판단할 것이다. 일을 서두르다 또다시 무언가를 잃고 싶진 않았다. 로로리토의 주장은 대략 이러했다. 새로운 황제가 탄생했으니, 갈레말 제국이 다시 에오르제아에 쳐들어오는 것은 시간문제이며 그런 상황에서 국가 체제를 바꾸는 것은 너무나 무모하다는 것이다. 텔레지 아델레지는 이것을 막으려 암살 계획을 꾸몄고, 로로리토는 이 음모를 이용했다. 나나모를 깊은 잠에 빠뜨려 체제를 유지하는 동시에 텔레지 아델레지를 노린 것이다. 여기까지는 파파샨에게 들은 내용과 같았다. '이토록 강경한 수단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여왕 폐하께서 왕정 폐지라는 중요한 결단을 우리 모래전갈회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심복인 라우반에게는 상의를 하셨어야지요' 그 말은 나나모 마음에 비수가 되어 꽂혔다. 라우반에게 이야기하면 말릴 것이 분명했기에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점점 심각해지는 난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백성들의 목소리를 정부에 전달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들고 싶었다. '솔직히 말씀 드려, 나나모 폐하는 울다하에 닥친 위기를 너무 만만하게 보십니다' 투기장의 영구 우승자인 라우반이 백성들에게 절대적인 인기를 얻고 있으니, 공화제로 바뀐 뒤에도 정권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물론 로로리토를 포함한 상인들이 백성들을 매수하기도 하겠지만, 그것 또한 부를 분배하는 효과가 있으리라 여긴 것이다. 하지만 섣부른 판단 탓에 결국 이번 소동이 일어났으며, 라우반은 왼팔을 잃었고, 큰 도움을 받았던 '새벽의 혈맹'을 사실상 무너뜨린 셈이 되었다. 아무리 후회해도 모자랄 결과였다. '허나, 모든 일이 계획대로 풀린 것은 아닙니다. 새벽 일당을 놓친 것도 그 중 하나. 설마 왕궁 안에서 대판 싸움을 벌일 줄이야…… 그 때문에 사태가 더욱 복잡해진 것은 사실이지요' 로로리토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빛의 전사에게 여왕 암살 혐의를 씌워 '새벽의 혈맹'을 없애려 한 것은 텔레지 아델레지가 꾸민 계획이라고 했다. 로로리토는 이것이 개척 계획을 가로막은 데 대한 보복이라 여겼다. 로로리토 본인은 '새벽'에 별다른 원한이 없었지만 모든 일을 마무리할 때까지 일베르드가 자신의 장기말이라는 것을 텔레지 아델레지에게 들켜선 안되었다. 따라서 그 자리에선 일단 '새벽' 관계자를 잡아들인 뒤, 나중에 소동이 가라앉으면 혐의가 없다며 풀어주려던 모양이었다. 순전히 피해자인 '새벽'에게 책임을 돌리는 듯한 말투에 나나모는 화가 났지만 겨우 말을 삼켰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일베르드의 배신……. 라우반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두고 의견이 대립한 것은 이미 알고 계시겠지요‘ 그 이야기는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일베르드는 왜 고용주인 로로리토의 뜻을 거스르면서까지 그토록 라우반을 죽이려 든 것일까? 로로리토는 여기에 대한 의견도 내놓았다. 일베르드는 로로리토와 손을 잡고 자금과 무기를 얻어 알라미고 난민을 한데 모으려 했다. 그리고 저항군을 조직하여 알라미고로 보낸 뒤, 제국군의 움직임을 방해하여 시간을 벌려던 것이다. 울다하 주변에 있는 난민 수를 줄이는 효과도 있으니 그야말로 일석이조라는 말이다. 하지만 라우반이 걸림돌이었다. 알라미고 난민들이 모래전갈회까지 오른 라우반을 희망으로 여기며 울다하에서 성공하기를 꿈꾸었기 때문이다. 고향 알라미고가 제국군의 탄압으로 고통 받고 있다는 현실에서 눈을 돌린 채…….

'일베르드는 알라미고 난민이 정신을 차리게 하려면 라우반이 죽어야 한다고 여긴 것이지요. 허나, 여왕 폐하를 다시 왕좌에 앉히려면 라우반이라는 존재가 꼭 필요했으니 그 일로 우리는 서로 등을 돌리게 된 겁니다' 만약 라우반이 죽었다면 나나모는 어땠을까? 도저히 제 정신으로 버틸 자신이 없다. 자포자기한 채 또다시 왕정을 폐지하겠다고 선언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결국 로로리토 생각이 옳았다고 볼 수 있었다. 자기가 꾸민 음모를 술술 늘어놓던 로로리토는 이야기를 마치며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받아두십시오, 여왕 폐하……' 그것은 로로리토가 관리하던 텔레지 아델레지의 모든 재산과 그 자신이 가진 재산 중 절반을 왕궁에 바치겠다는 계약서였다. '로로리토…… 네 이놈, 돈으로 모든 걸 해결하겠단 속셈이냐!' 로로리토가 보인 태도에 라우반은 끝내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며 일어났으나, 나나모는 손을 들어 그를 말렸다. '돈으로 해결하는 것이야말로 장사꾼이 책임지는 방법…… 이 돈을 새벽을 돕는 데 쓰든 난민 정책에 쓰든, 마음 가는 대로 하시지요……. 그렇지만 폐하, 제국군 대책은 서둘러 마련하심이 좋을 것입니다. 자, 그럼 저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로로리토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 다시 가면을 쓰고선, 물러가도 좋다는 허락도 없이 '향불방'을 떠났다. 로로리토와 대면한 뒤, 나나모는 방으로 돌아가 홀로 고민에 빠졌다. 그가 저지른 짓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 하지만 자신이 계획한 방법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 또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경솔한 판단이 불러일으킨 혼란과 희생……. 책임을 지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적어도 로로리토는 본인에게 피와 살 같은 재산을 절반이나 내놓기로 마음먹었다. 그렇다면 아직 여왕 자리에 있는 나나모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라우반을 이리 들라 하여라!' 새로운 시녀를 따라 방으로 들어선 라우반에게 나나모는 종이 한 장을 건넸다. 로로리토가 준 계약서에 나나모가 서명한 것을 보고 라우반은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러자 나나모가 말을 꺼냈다.

'짐은 로로리토가 싫다!' '예……' '허나, 그보다도 나 자신이 더 싫구나. 가장 믿어야 할 사람과 상의도 없이, 모래전갈회의 말도 듣지 않고 은인들까지 다치게 하다니, 어쩌면 이리도 어리석단 말이냐! 라우반은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만 떨구고 있었다. '로로리토는 비열하고 비정한 데다 탐욕스럽다. 그렇지만 능력이 있고, 무엇보다 울다하를 지키려 힘쓰지 않았더냐' 복잡한 감정이 밀려오자 나나모는 갈등했다. 그래도 곧 마음을 굳혔다. 라우반은 경애하는 나나모를 언제부터인가 마치 아버지와 같은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나모가 라우반을 향해 뒤돌아서며 힘차게 말했다. '지금 당장 팔관부 수장을 불러 모아라! 산악도시 이슈가르드를 에오르제아 동맹군으로 복귀시켜 갈레말 제국과 맞서 싸울 방법을 찾을 것이니라! 그리고 숨을 크게 내쉰 뒤 말을 이었다. '라우반, 짐은 로로리토 같은 자도 부릴 수 있는 여왕이 되겠노라!' 나나모에게 이것은 선서였다. 고작 다섯 살의 나이로 왕위를 물려받을 당시, 대관식에서 뜻도 모른 채 말했던 선서와는 달리 진심 어린 결의가 담긴 선서였다. '예! 폐하!' 라우반은 울다하에 여왕이 돌아왔다는 것을 새삼스레 실감했다. 사막의 여왕과 한 팔을 잃은 장군은 다시 웃음을 되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