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월의 종언 못다 한 이야기

패치 V7.0 황금의 유산 메인 스토리의 내용 중 일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직 메인 스토리를 완료하지 못한 분께서는 주의 부탁 드립니다.

「별들과 나눈 약속」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 아래, 스펜이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에버킵 최상층인 그곳은 한때 신생 알렉산드리아 연왕국을 다스렸던 무왕 조라쟈가 죽음을 맞이한 장소다. 국민을 영원인으로 만들고자 했던 칼릭스와의 대결이 끝나고, 이 나라에서는 희망자들을 대상으로 레귤레이터에 의해 봉인되어 있던 죽은 자들의 기억을 해방하는 ‘기억 복원’이 시행되어 왔다. 그렇게 죽은 자에 대한 기억을 되찾은 국민들의 요청으로, 이 최상층에서는 장례식이 몇 차례 치러졌다. 장례식이라고 해도 가까운 유족이 헌화대에 조용히 꽃을 바치는 게 전부인 소박한 의식일 뿐이지만, 스펜은 유족이 원하기만 하면 반드시 장례식에 참석하려 하고 있다. 신생 알렉산드리아 연왕국은 거대한 반구형 마법 장벽으로 덮여 있어 뇌운 위에 있는 최상층에서도 태양을 직접 볼 수는 없다. 그래도 대기 중의 미세 입자들이 장벽을 뚫고 들어오는 햇빛을 흩트려 주기 때문에 하늘은 부드러운 파란빛으로 물들어 있다. 오늘 열린 장례식도 무사히 끝났다. 죽은 자와의 소중한 추억을 다시금 가슴에 품은 참석자들은 애석해하면서도 하나둘씩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리하여 스펜을 제외하면 고인의 아내이자 상주인 여성과 몇 명의 직원만이 최상층에 남았을 무렵, 하늘은 점차 붉은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고인은 사카 투랄 출신 토나와터족 남성이었다. 헌화대에는 하얀 꽃과 함께 고인이 생전에 좋아했던 기호품과 추억이 담긴 여러 물건이 놓여 있다. 스펜이 뒷정리하는 유족에게 말을 걸려 하는 순간, 오래된 가죽 표지 책이 문득 눈에 들어왔다. “그건…… 남편 물건이에요. 장벽 속에 갇히기 전, 툴라이욜라 상인에게서 산 모험 이야기책이라고 하더군요. 딸아이가 그 이야기를 무척 좋아해서, 어릴 적에 많이 읽어 줬죠. 덕분에 안쪽은 딸이 그린 낙서로 빼곡하답니다.” 그렇게 말하며 그녀가 책장을 팔락팔락 넘기자, 여백을 자유롭게 뛰노는 로네크들이 눈에 들어와, 스펜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후후, 나랑 똑같네. 내 마도서에도 어릴 때 내가 그린 낙서가 남아 있거든.” 언젠가 소중한 존재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며 부모님이 선물해 주신 마도서의 여백에는 어린 스펜이 그려 넣은 동물과 마물 낙서가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그 낙서를 본 왕국기사 오티스는 “세기의 걸작입니다!”라고 말하며 스펜이 부끄러워할 정도로 진지하게 칭찬했고, 왕국기사 젤레니아도 “참 잘 그리셨네요.”라며 임무 중엔 좀처럼 볼 수 없는 다정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순간 스펜의 마음이 그리움으로 가득 차올랐다. 소중한 추억이 하나라도 새어 나갈까 스펜은 살짝 눈을 감았다. 기억 속의 우리는 여전히 웃고 있다. ‘내가 마법을 더 잘 쓰게 되면 두 사람과 같이 싸울 수 있는 거지?’ ‘그럼요, 스펜 님이라면 금방 실력이 느실 겁니다.’ ‘무슨 소리냐! 스펜 님을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다!’ ‘그런 말은 일단 저를 한 번이라도 이기고 나서 해 주시면 좋겠군요, 오티스.’ ‘끄으으으응…….’ ‘후후, 그럼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다 같이 알렉산드리아를 지키자.’ 서쪽 하늘에서 유독 빛나는 샛별에게, 먼 과거의 우리는 알렉산드리아의 평화를 지키겠노라 약속했었다. 끝없이 밀려오는 추억을 조심스레 가슴속에 접어 두고, 스펜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낙서를 남긴 딸은 어디 있는지 묻자, 장례식 참석을 거부하고 끝내 오지 않았다고 한다. 듣자 하니 고인의 일족에 전해 내려오는 삶과 죽음에 관한 믿음 때문이라고 했다. 전해지는 말들에 따르면, 죽음으로 인해 육체를 떠난 영혼은 하늘의 별이 되어 남은 이들의 앞길을 밝게 비추어 준다고 한다――. “남편에 대한 기억을 되찾은 딸은 그 이야기를 떠올린 거겠죠. 그 아이는 이 책에도 나온 별들의 전설을 굳게 믿었으니까요…….” 스펜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며 별을 찾았지만, 별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별빛은 태양광과 달리 마법 장벽에 가로막혀 안까지 닿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아는 딸이 사랑하는 아버지를 추모하는 장소로 이런 곳을 원하지 않은 것도 이해가 간다. 딸의 이름은 웨디퀘. 스펜이 잠들어 있던 400년을 빼면 두 사람의 나이는 비슷했다. 알렉산드리아인이 삶과 죽음에 관한 독자적인 믿음을 가지듯이,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도 당연히 각자의 신념이 있을 것이다. 이 나라를 지키는 이왕으로서,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동료로서 그것을 존중하지 않고 외면한 채 지나칠 수는 없었다. 그 사람이 긴 잠에서 깨어난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소중한 추억을 지켜 준 것처럼. “……있잖아, 내가 직접 웨디퀘랑 얘기해봐도 될까?” 미안해하는 어머니에게 받은 정보를 토대로, 스펜은 승강기를 타고 솔루션 나인으로 내려와 소녀를 찾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웨디퀘는 이 시간대라면 주로 유페 원형농지에 일을 도와주러 간다고 한다. 스캐닝 포트 방면으로 가는 길에, 스펜은 혹시 몰라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매점을 운영하는 리안더에게 웨디퀘를 보지 못했냐고 물었다. 예전에 그가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을 아주 주의 깊게 관찰한다는 사실을 알고 놀란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 애라면 아까 여길 지나갔답니다. 평소처럼 농지에 가는 것 같았는데, 오늘은 기운이 좀 없어 보였어요.” 그렇게 말한 리안더는 인기 상품인 ‘천사의 간식’을 두 개 내밀었다. 기운이 날 테니, 웨디퀘와 같이 먹어달라는 말과 함께. 스펜이 놀라서 값을 치르려 하자, 그는 “이왕님이 드셨다는 소문이 나면 상품 가치가 올라가니까요.”라는 배려 섞인 말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 스펜은 리안더에게 감사 인사를 한 뒤 에버킵 밖으로 발길을 서둘렀다. 헤리티지 파운드로 나와서 아웃스커츠를 지나 유페 원형농지로 향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인연을 맺은 사람 중 한 명인 농무원 마후사를 만나, 사정을 이야기하며 소녀의 행방을 물었다. “아, 들었어. 그 애도 기억 복원을 받았다지? 요즘 들어 로네크를 자주 돌봐 주는데, 그것도 아버지의 영향이었구나. 소중한 기억이긴 해도, 받아들이려면 시간이 걸리겠지.” 그렇게 말하며 마후사가 가리킨 축사 구석에서, 스펜은 쪼그려 앉은 토나와터족 소녀를 발견했다. 소녀도 인기척을 느꼈는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울어서 퉁퉁 부어 있던 소녀의 눈이, 자기 앞에 있는 사람이 스펜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휘둥그레졌다. “어…… 스펜 님!?” “웨디퀘…… 맞지? 놀라게 해서 미안. 너희 어머님께 네 얘기를 듣고 한번 만나 이야기해 보고 싶었거든.” 웨디퀘를 마을 외곽으로 데리고 나온 스펜은 그녀의 옆에 앉아 ‘천사의 간식’을 건네고, 조심스럽게 하고 싶은 말을 전했다. 지위나 출신과 상관없이 널 돕고 싶을 뿐이라고. 처음에는 당황하던 웨디퀘도 그 말을 듣고 조금씩 본심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장례식을 치르는 장소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 아니에요. 그냥 옛날에 아버지와 별을 보러 가자고 약속한 게 생각이 나서……. 뇌운 너머 빛나는 수많은 별――그것들은 우리 조상님들이고, 그분들은 땅에서 할 일을 마친 후에 하늘을 여행하고 있는 거래요. 그리고 항상 우리를 지켜보며 용기를 주는 소중한 존재라고요.” 그러나 장벽 밖으로 나가기 전, 아버지는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사실을 아직 받아들이지도 못했는데, 장례식을 치르는 곳에서도 별빛 하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자 마음을 추스를 수 없었다고 한다. 더구나 같은 시기에 기억 복원을 받아 슬픔에 잠겨 있는 어머니에게 이 마음을 털어놓을 수도 없어, 대신 농장에서 생전에 아버지가 돌보던 로네크를 보살피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털어놓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약속하지 말 걸 그랬어요…….” 기억을 되찾는다고 해서 고인이 돌아오지는 않는다. 스펜은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딸을 남기고 떠나야 했던 아버지의 안타까운 마음을 떠올렸다. 분명 선왕…… 또 하나의 ‘나’는 이런 사람들을 내버려둘 수 없어서 필사적으로 리빙 메모리에 그들의 기억을 남겨 그 뜻을 이어가려 했던 것이리라. 그래도 우리는 슬픔을 이겨 내고 살아가야만 한다. 그리고 스펜은 알고 있다. 누군가가 지키지 못한 약속을, 또 다른 누군가가 대신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을. “그럼…… 나랑 같이 별을 보러 가자!” 망설이는 웨디퀘의 손을 잡고 걷기 시작한다. 황야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만, 지금은 마력이 돌아왔으니 마물을 쫓아내는 정도는 할 수 있다. 이대로 계속 나아가면 장벽 밖에서 밤하늘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이! 스펜!!” 우렁찬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웃 나라 툴라이욜라의 무왕 우크라마트였다. 그 뒤로 이왕 쿼나와, 알렉산드리아의 무왕 권한을 이어받은 소년 굴루쟈가 모습을 드러냈다. 스펜은 내일 무왕 조라쟈의 장례식이 예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국민에게 많은 희생을 강요한 인물이기에 국가 차원의 추도는 어려웠지만, 유족들――특히 아들인 어린 굴루쟈에게는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리라 생각해 내린 결단이었다. “공무가 간신히 비어서 조금 일찍 출발했어. 도착하면 너한테 인사하러 가려고 했는데…… 어디 가는 길이야?” 의아해하는 그들에게 사정을 설명하기가 무섭게, 우크라마트는 “반구 밖으로 나갈 거면 안내랑 호위는 우리에게 맡겨!”라며 호탕하게 외쳤다. 이웃 나라 왕족이 호위를 자처하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웨디퀘의 눈이 휘둥그레지자, 툴라이욜라 연왕국의 이왕 쿼나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토나와터족이신 아버님은 툴라이욜라의 소중한 국민이기도 하니까요. 돌아가신 아버님과 하신 약속을 지키러 갑시다.” 그렇게 세 명의 왕과 한 명의 왕 후보를 동반한 아주 작은 여행이 시작되었다. 헤리티지 파운드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스펜 일행은 뱅가드 전초기지를 빠져나와, 얼마 후 장벽 밖으로 나오는 데 성공했다. “어, 어라……? 아까까지만 해도 맑았는데.” 굴루쟈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초조함이 담긴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이미 해가 기울기 시작한 황야의 하늘은 어두침침한 잿빛 구름에 덮여 있었다. “남쪽에는 아직 구름에 덮이지 않은 곳이 있습니다. 샬로니 황야 쪽으로 가면……” 쿼나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웨디퀘가 말한다. “아뇨, 이제 됐어요……! 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고집을 부렸어요.” 스펜은 자기보다 키가 약간 작은 소녀의 양손을 잡고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한다. “괜찮아, 포기하지 않아도 돼!” 스펜이 우크라마트에게 눈짓하자, 우크라마트는 다 안다는 듯이 씨익 웃으며 끄덕였다. 그리고 곧바로 링크펄 통신으로 샬로니 황야와 알렉산드리아를 잇는 철도를 운영하는 회사, 사카 투랄 철도 회사에 연락을 취했다. 통신을 마친 우크라마트가 환하게 외쳤다. “우리가 타고 왔던 마지막 열차가 아직 출발하지 않았대. 탑승 허가도 받았으니 바로 탈 수 있어!” 우크라마트가 말한 대로 정거장에는 청린기관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운전사 니토위퀘가 창문에서 몸을 반쯤 내민 채 “그렇다면 구름에 덮이지 않은 곳까지 달려 보자고!”라고 믿음직스럽게 말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철도를 봐서 쭈뼛거리는 웨디퀘를 다독이며, 스펜과 일행은 열차에 올라탔다.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 열차는 점차 속도를 높였다. 높게 치솟은 장벽이 점점 멀어지고 그 형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할 즈음, 창문 밖을 보던 굴루쟈가 신난 목소리로 외쳤다. “웨디퀘, 하늘을 봐! 여긴 구름이 없어!” 그와 동시에 열차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황야 한가운데에 멈춰 섰다. 웨디퀘는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처음 본 밤하늘은 이야기에 나오는 것처럼 끝없이 펼쳐져 있었고, 부드러운 별빛은 생명 그 자체처럼 느껴졌다. 숨 쉬는 것조차 잊을 만큼, 믿을 수 없을 만큼 무수한 별이 머리 위에서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어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저게…… 별……?” 웨디퀘는 자기도 모르게 밤하늘을 향해 팔을 뻗었다. “이제…… 약속은 지킨 거죠? 아버지…….”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웨디퀘 옆에서 스펜도 알렉산드리아 국민들과 나누었던 수많은 약속을 떠올리고 있었다. 지킬 수 있었던 약속도, 지키지 못한 약속도 있다. 그럼에도, 바로 그 약속들이 자신을 지금 이 순간, 미래로 이끌어주었다. “선왕…… 그 녀석과의 약속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거야. 함께 살아갈 수는 없지만, 그 소망과 함께 같은 길을 걸을 수는 있지.” 그 말대로라고, 스펜은 생각했다. 약속이란 같은 미래를 공유하기 위한 계약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도 알렉산드리아의 미래를 수많은 사람과 약속하고 싶다. 구름 위로 보냈던 더없이 소중한 기억을 가슴에 품고, 내일이 기다려질 만큼 설레는 미래를. 굴루쟈가 근처에 있는 언덕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위에선 별이 더 잘 보이겠다!” 굴루쟈가 달려 나갔고, 그 뒤를 우크라마트와 쿼나가 따라간다. 스펜도 웨디퀘에게 손을 내밀며 말한다. “우리도 같이 가자!” 눈물로 젖은 웨디퀘의 얼굴에, 금세 웃음꽃이 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