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서 온 ‘손님’을 트레노 주민들과 함께 배웅한 뒤의 일이다. 탕약을 다 나눠 준 루무르는 컵을 기울이며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번개구름 사이로 빛이 번뜩이는 모습은 여전하지만, 경계색을 내뿜던 구멍투성이 장벽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은 흠 하나 없이 차분한 빛깔의 덮개가 트레노를 포근하게 감싸고 있다. 그것을 복구해 낸 공로자가 바로 동생 에야네였으니, 루무르의 얼굴에 자연스럽게 미소가 번질 만도 하다.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 “나 참, 에야네는 이렇게 훌륭하게 잘 자랐는데, 난 이 모양이라니…….” 덜렁거리는 성격은 여전했다. 마물탐지기를 몇 번이나 망가뜨린 것도, 기쁨에 겨워 복구 작업 개시 구호를 잊어버린 것도 고의는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뼈아픈 실수를 했었지…… 루무르는 비어 있는 반대쪽 손으로 머리에 쓴 고글을 살며시 만졌다. 그것은 부모님을 여읜 고난 속에서도 손을 맞잡고 쑥쑥 큰 어린 남매의 작은 다짐이 담긴 추억――. 시간은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법 생물이 깃든 장갑 열차 ‘글라시아 라볼라스’가 트레노를 덮치면서, 루무르 가족이 살던 구역은 순식간에 붕괴하고 말았다. 마지막까지 동포들의 대피를 도왔던 아버지 노손과 어머니 마세아를 포함해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간신히 도망쳐 나온 어린 남매는 할머니 미아일리에게 몸을 의지한 채 그저 슬픔에 잠겨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매일같이 눈물을 흘리는 어린 동생을 앞에 두고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고, 루무르는 자신을 채찍질했다. 힘들고 괴로운 상황 속에서도 할머니는 트레노의 수장으로서 최선을 다하고 계셨다. 그렇다면 자신도 동생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다. “울기만 하면 안 돼, 난 오빠니까. 그렇지? 아빠, 엄마…….” 루무르는 다짐했다. 과거의 ‘울보 루무르’와는 작별하고 앞으로는 자신이 에야네를 지켜 주겠노라고. 그리고 필사적으로 고민했다. 깊은 슬픔에 빠진 동생이 기운을 차리게 하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동생을 위해 무얼 할 수 있을지. 오랜 고민 끝에 루무르는 예전에 살았던 구역에 가 보기로 했다. 글라시아 라볼라스가 트레노로부터 멀어진 후에도, 잔해 더미가 무너질 위험이 있다면서 아무도 가까이 가려 하지 않는 곳.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북적거렸던 거리는 이제 황량하게 적막만 감돌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루무르의 머릿속에 문득 집에서 추억이 담긴 물건을 가져오자는 생각이 스쳤다. “그런데 이래선 집까지 못 가겠는걸……. 우선 길부터 정리해야겠어.” 그리하여 길을 막은 잔해를 곡괭이로 부수고, 흙더미를 삽으로 파내는 나날이 시작되었다. 열 살 남짓 살아오면서 이런 중노동을 해 본 적은 거의 없었다. 그의 작은 손은 금세 까지고 물집이 잡혔으며, 팔과 다리도 지칠 대로 지쳐갔다. 그러나 루무르는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무너진 구역에 드나든 지 며칠이 지났을 무렵. 루무르가 하는 일을 사람들이 알아챈 건지 아니면 미아일리가 불러 모아 준 건지는 모르겠지만, 동포들이 협력해 주기 시작했다. 듣자 하니 왠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는 사람도 있었고, 루무르처럼 추억이 담긴 물건을 찾으러 왔다는 사람도 있었다. 계기는 저마다 달랐지만, 괴로워도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는 마음은 모두 같았다. “우오오옷! 근육이여, 울부짖어라!” “이야아압! 잔해여, 부서져라!” 곡괭이를 휘두르는 친구들의 의욕 넘치는 목소리와 경쾌한 타격음이 울려 퍼졌다. 기약 없는 작업이 될 것이라 각오했던 루무르였지만, 동포들 덕분에 길이 조금씩 열리고 있었다. 그날은 동포가 찾던 물건이 나왔다. “코이미 씨네 집으로 가는 길이 뚫려서 씨앗이 든 자루를 회수해 왔어!” “어머나, 고마워…… 다시 한번 꽃을 키워 볼까?” “좋지, 이사 간 구역에서도 정원을 만들 수 없을지 할머니께 여쭤볼게.” 어느 날은 그늘에 숨어 있던 마물이 나타났다. “까, 깜짝이야! 타마트가 쫓아내 준 덕분에 살았네…….” “으하하, 별것도 아닌데 뭘! 그깟 일로 겁먹었다간 새들을 지킬 수 없다고!” “이쪽 구역과 목장에 순찰을 늘려줄 수 없는지 할머니께 부탁드려 봐야겠다.” 때로는 미처 대피하지 못한 동포의 시신을 발견하기도 했다. “미안해, 페페프 씨…… 더 일찍 찾아냈어야 했는데……” “루무르, 네가 자책할 필요는 없어……. 아내를 찾아 줘서 정말 고마워.” “잔해를 치운 곳에 제대로 된 묘지를 만들어 달라고 할머니께 말씀드려볼게.” 돌이켜 보면 무슨 일이든 할머니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자신이 답답하게 느껴졌던 나날이었다. 그래도 루무르는 낙심하지 않고 예전에 살던 집을 향해 꿋꿋이 나아가면서, 누군가가 찾던 물건을 발견하면 하나하나 가져다주었다. 에야네를 위해 시작한 이 활동이, 돌고 돌아 동생처럼 마음에 상처를 입은 이들에게 위로가 되고 사람들의 삶을 나아지게 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건을 찾아주는 일을 통해 점차 믿음직한 존재가 되어 가던 루무르가 ‘식단 상담부터 짐 나르기, 분실물 찾기까지 뭐든 다 하지’라는 말을 스스로 하게 되는 것은 아직 조금 더 미래의 일이다. 그렇게 기쁨도 슬픔도 모두와 함께 나누며 활동을 계속하던 루무르는, 마침내 예전에 살던 집에 도착했다. 각오는 했으나, 형체조차 남지 않은 처참한 집의 모습을 보고 루무르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에야네가 기운을 차리게 할 만한 물건이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극도로 불안해졌기 때문이다. 일단 집의 잔해부터 정리하자고 마음먹은 그 순간, 유달리 강한 번갯빛이 근처를 환히 비추었다. 그 빛에 반사된 ‘무언가’를 알아챈 루무르는 곧바로 잔해 틈 사이를 들여다보았다. “고글이다……!” 부부가 한 쌍으로 맞춘 그 고글은 부모님을 상징하는 물건이었다. 글라시아 라볼라스가 습격해 온 날, 급히 주민들의 대피를 도와주러 나갔던 두 사람은 고글을 챙겨 쓸 시간도 없었을 테다. 루무르는 너무 기쁜 나머지 마음이 조급해졌다. 잔해 틈새로 팔을 집어넣고, 기적적으로 무사했던 고글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끝에 닿을 듯 말 듯한 감촉이 느껴져 필사적으로 몸을 내밀었는데――그게 실수였다. 살짝 움직인 잔해에서 조각이 후드득 떨어지는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야, 루무르!! 위험해!!” 타마트가 날카롭게 소리치며 루무르를 뒤쪽으로 강하게 끌어당겼다. 그 순간 집의 잔해가 크게 무너지며 틈새를 막았고, 흙먼지가 공중에 흩날렸다. 간발의 차로 목숨을 건진 루무르는 엉덩방아를 찧은 채 고글이 있었던 곳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평소 같았으면 구해 줘서 고맙다는 말부터 했을 것이다. 그러나 머릿속이 새하얘진 그때는 감사 인사도 잊은 채 잔해를 치우는 데 매달렸다. 이번에야말로 신중하게, 더 이상 상황이 나빠지지 않도록 조금씩 장애물을 치워 나갔다. 동포들도 도와준 덕분에 간신히 고글을 찾기는 했으나, 조금 전 무너져 내린 잔해에 깔린 탓에 뭉개져 있었다. “나는 왜 꼭 중요한 순간에 사고를 치는 거람…….” 분명 에야네는 실망할 것이다――렌즈가 깨지고 테는 찌그러진 고글을 바라보며, 루무르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져 입술을 깨물었다. 이번 일은 그의 마음을 꺾기에 충분하고도 남았지만, 그래도 부모님이 살아 계셨던 증거를 찾아낸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두 개의 고글을 살며시 주운 그는, 집을 뒤로하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루무르는 고개를 떨군 채 중앙 회관 방 안에 틀어박혀 있는 에야네에게로 향했다. 무릎을 끌어안고 멍하니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던 에야네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더니, 돌아온 오빠를 보고 작은 목소리로 “어서 와”하고 입을 뗐다. “있잖아, 에야네. 오빠가 드디어 우리 집에 다녀왔어.” “……우리 집에?” “응. 그리고 거기서…… 이걸 찾았어.” 루무르는 자신이 망가뜨린 두 개의 고글을 쭈뼛거리며 내밀었다. 그것이 부모님의 물건이라는 사실을 이해했는지, 에야네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처음 발견했을 때는 멀쩡한 상태였는데 말이지. 급하게 주우려다가 잔해가 무너져 내리는 바람에 찌그러져서…… 정말 미안해.” “무너져 내렸다고……? 오빤 안 다쳤어?” “어? 아, 응, 난 괜찮아. 타마트랑 다른 사람들이 구해 줬거든.” 그제야 다행이라며 안심한 듯한 에야네는 고글 하나를 손에 들었다. 그러고는 그것을 가슴에 끌어안더니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렸다. 부모님의 자취를 느낄 수 있어 기뻐서 흘리는 눈물인지, 아니면 심하게 망가진 모습에 마음이 아파 흘리는 눈물인지 루무르는 알 수 없었다. 어찌 됐든 뼈아픈 실수를 저지른 직후였으니 말이다. 동생을 울렸다는 사실에 당황하면서도, 그는 아무 말 없이 동생 곁에 있어 주었다. 잠시 후, 한바탕 울고 난 에야네가 크게 심호흡하며 고개를 들었다. “너무 많이 울어서 머리가 아프네……. 오빠가 만든 탕약 마시고 싶다…….” 에야네는 아주 오랜만에 미소를 지었다. 그 표정을 보고 이번에는 루무르의 눈시울이 뜨거워졌지만, 간신히 이를 악물고 버텼다. 소매로 눈가를 쓱쓱 닦고는 얼버무리듯이 웃으며 끄덕였다. 고글을 찾은 그날 이후로 에야네는 눈에 띄게 기운을 차렸다. 그리고 루무르가 무너진 구역에서 활동을 이어가는 동안, 에야네는 일렉트로프 기술자가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한 듯했다. 왜 기술자가 되려고 하는지 궁금해진 루무르는 동생에게 이유를 물어보았다. “왜냐하면 오빠는 다정하고 부지런하지만 덜렁이잖아? 그러니까 실수로 뭔가를 망가뜨리더라도 앞으로는 에야네가 고쳐 주려고. 아빠랑 엄마의 고글도 꼭 고칠 거야!” 얼굴 가득 미소를 띠고 다짐을 얘기하는 에야네의 모습에 루무르의 가슴이 따스해졌다.
그립고도 씁쓸한 추억과 함께 루무르는 남은 탕약을 단숨에 들이켰다. 손님이 글라시아 라볼라스를 쓰러뜨렸다는 소식을 부모님께 전하러, 나중에 에야네와 미아일리와 함께 성묘를 가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어디선가 동포의 비명이 들려왔다. “으아아, 또 미끄러졌어! 떠, 떨어진다……!” “어쩌다 그랬어~! 괜찮아!?” 높은 곳에서 자주 떨어질 뻔하던 동포가 이번에도 일을 저지른 모양이다. 서둘러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한 루무르는 걱정하며 말을 걸던 동포와 힘을 합쳐서 지붕에 매달려 있던 그를 끌어올렸다――하지만 그 바람에 재킷에서 소중한 도구가 굴러떨어졌다. “으악, 큰일 났다! 마물탐지기가!” 구출한 동포를 뒷전으로 미룬 채 루무르는 허겁지겁 마물탐지기를 되찾으러 달려갔다. 잃어버리지 않은 건 다행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스위치를 눌러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루무르는 마치 세상이 끝나버린 듯한 심정으로, 식량 공장 증설에 대해 의논하러 간 에야네를 기다렸다. 그리고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돌아온 그녀를 맞이한 다음, 쭈뼛거리며 마물탐지기를 내밀었다. 눈치 빠른 동생은 모든 것을 알아차린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오빠, 장난치는 거지…………? 그새 또 고장 냈어!?” “아니 그게, 지붕에서 떨어질 뻔한 녀석을 끌어올리는데 그때 하필 이게 떨어져서 데굴데굴…… 미, 미안해!!” 에야네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커다란 한숨을 쉬었다. “어휴~~ 내가 못 살아! 고쳐 줄 테니 이리 줘! 장벽이 복구됐으니 쓸 일은 줄어들겠지만, 떨어뜨리지 않게 조심 좀 해. 뭐, 오빠가 지붕에서 떨어지는 것보단 훨씬 낫긴 하지만.” 덜렁대는 오빠에게 잔소리를 하면서도, 야무진 동생은 늘 오빠를 걱정해 준다. 고마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뒤섞인 채, 루무르는 에야네의 꼼꼼한 일솜씨를 지켜보았다. 두 사람의 머리 위에는 예전에 오빠가 찾아내고 동생의 손으로 고쳐 낸 부모님의 유품인 고글이 오늘도 함께하고 있다. 동생을 지키려는 오빠와 오빠의 힘이 되려는 동생의 다짐이 담긴 그 증표는 앞으로도 두 사람을 지켜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