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다 한 이야기:황금편

'황금의 유산' 스토리의 내용 중 일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직 메인 스토리를 완료하지 못한 분께서는 주의 부탁 드립니다.

「파도를 기다리는 형제」

“좋은 파도가 안 오잖아…….” 딥 블루는 짜증이 나 있었다. 레귤레이터를 떼어낸 지금, 마물의 영혼을 써서 거대한 파도를 만들어낼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솔루션 나인의 인공 해양 수영장처럼 서핑하기 딱 좋은 파도가 끊임없이 밀려오는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곳은 툴라이욜라의 ‘고니트루크 빛모래톱’, 만들어진 가짜가 아닌 진짜 바다였으니까. “형님,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옆에 앉은 레드 핫이 무뚝뚝하게 내뱉었다. 너무나 당연한 소리를 들으니 딥 블루는 한층 더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아르카디아의 휴장 기간을 이용해 익스트림즈 둘이서 처음으로 장벽 밖에 나와 봤지만, 바깥세상은 생각보다 따분했다. 샬로니 황야는 끝없이 황량한 풍경의 연속이었고, 툴라이욜라 역시 구시대적인 도시라 딱히 즐길 만한 거리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가장 기대했던 바다조차 파도 하나 없이 잔잔하기만 하여, 아무리 기다려도 서핑은 힘들어 보였다. 차라리 일렉트로프 기술로 재현한 ‘가짜’가 훨씬 낫네. 그것이 진짜 바다를 처음 접한 딥 블루의 꾸밈없이 솔직한 감상이었다. 기다림에 지쳐 자리에서 일어난 그에게, 레드 핫이 중얼거렸다. “마음대로 안 되네, 인생처럼.” 바보 주제에 뭘 안다고 아는 척이야―― 딥 블루는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하지만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버린 것도 사실이었다. 왜냐면 그의 인생 자체가 마음대로 안 되는 일들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딥 블루의 가장 오래된 기억은, 레크리에이션 존 뒷골목에 우두커니 서서 혼자 울던 일이다. 거번먼트 직원에게 보호되어 보호시설로 보내지고 나서야, 어린 그는 자신이 부모에게 버려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부모의 얼굴조차 떠올리지 못하는 이유가 두 사람 모두 죽어 하늘에 기억이 맡겨졌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잊어버린 건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덕분에 슬픔이나 외로움 같은 차갑고 어두운 감정과도, 분노나 원망처럼 몸을 태우는 감정과도 무관하게 지낼 수 있었다. 한편 부모의 애정을 모르고 자란 탓인지 그는 난폭하고 협조성이 부족한 소년으로 성장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으면 곧바로 난동을 부리고, 시설의 방을 엉망으로 만들어 직원들의 골머리를 썩이는 손꼽히는 문제아였다. 그런 딥 블루도 이윽고 일할 나이가 되어 레졸루션에서 직업 상담을 받게 되었다. 그가 희망한 것은 위험한 마물을 토벌하는 ‘제거인’ 일이었다. 마물의 영혼을 이용해 싸우는 모습을 동경하기도 했고, 난폭한 자신에게 안성맞춤인 일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그리 뜻대로 풀리지는 않았다. “귀하의 자질로는 마물의 영혼을 다루기에 위험하다고 판단되었습니다. 또한 협조성에도 문제가 있어, 혼자 일할 수 있는 ‘청소부’ 일을 알선해 드리겠습니다.” 레졸루션의 담당관은 딥 블루와 눈길조차 맞추지 않은 채 담담하게 통보했다. 그 순간, 그의 분노가 폭발했다. 요란하게 난동을 부려 스스로의 행동으로 제거인에 맞지 않음을 증명해 버리고 말았다. 곧바로 기계병이 호출되었고, 딥 블루는 순간적으로 근처에 세워져 있던 에어스피너를 훔쳐 달아났다. 등 뒤에서 기계병들도 에어스피너를 타고 바짝 쫓아왔다. 가속 레버를 한계까지 비틀었다. 아주 사소한 판단 착오 하나가 대형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런 극한 상태 속에서 그는 깨달았다. 공포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가슴을 가득 채운 것은 지금껏 맛본 적 없는 스릴과 흥분이었다. 결국 길목을 지키고 있던 다른 기계병에게 붙잡히고 말았지만, 그때 그는 확신했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던 것을 찾아냈다는 것을. 유치장에서 풀려난 딥 블루는 곧장 뒷골목의 업자에게 돈을 빌려 중고 에어스피너를 손에 넣었다. 그리고 그때 맛본 흥분을 좇는 사이, 아슬아슬한 기술을 선보이는 곡예 주행을 하나씩 만들어 나갔다. 그의 무모한 라이딩과 화려한 기술은 일부 층에서 인기를 얻어 열광적인 팬이 생겼다. 거기에 후원자까지 나타나 빚도 모두 갚았으며, 마침내 그것이 생계 수단이 되었다. 거번먼트가 마련해 준 직업에는 맞지 않았던 딥 블루였지만, 대신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새로운 일을 만들어 낸 것이었다. 이윽고 시대의 총아가 된 딥 블루를 동경해, 에어스피너로 곡예 주행을 하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선구자에 버금가는 기교를 보이는 신참도 있었다. 그는 에어스피너의 호버링 기능에 의지하지 않고 공중에서 몇 번이고 회전하여 착지하는, 극도로 위험한 기술을 성공시켜 딥 블루의 경쟁심에 불을 붙였다. 그 신참이 바로 훗날의 레드 핫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강하게 의식했고, 경쟁하듯 기술은 더욱 과격해져 갔다. 관객은 대담한 퍼포먼스에 열광하며 그들의 명성을 높여 갔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언젠가 큰 사고가 나는 게 아니냐’는 목소리도 점차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두 사람의 승패를 가릴 맞대결이 한창이던 때였다. 레드 핫이 큰 기술을 시도했지만, 착지 자세가 살짝 무너졌다. 제어를 잃은 에어스피너는 관중의 비명을 찢듯이 날아가 상업 시설의 벽에 격돌했다. 다행히 레드 핫은 충돌 직전에 기체에서 뛰어내려 경상에 그쳤다. 시설 안에 있던 사람 중에도 부상자는 나오지 않았지만, 건축물이 입은 손실은 막대했다. 이 사고를 계기로 곡예 주행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완전히 변했다. 위험을 감지한 후원자는 떠나갔고, 딥 블루는 일자리를 잃었으며 겨우 손에 쥐었던 성공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역시 그의 인생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었다. 길거리를 헤매던 딥 블루 앞에 승부에서 패한 레드 핫이 나타났다. 그는 딥 블루를 ‘형님’이라 부르며 그를 따르게 되었다. 아무래도 레드 핫도 부모가 없는 모양이었다. 자신과 같은 처지에 대한 공감과, 자신보다 우둔한 상대에게 느끼는 우월감에, 딥 블루는 그를 아우로 대하며 함께 행동하게 되었다. 그런 레드 핫이 솔루션 나인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인공 해양 수영장의 서핑 경기에 나가 보지 않겠느냐는 말을 꺼냈다. 딥 블루는 그다지 구미가 당기지 않았지만, 한때 존재했던 옛 세계에서 치러졌다는 그 경기는 곡예 주행과 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달리 열중할 것도 없었던 두 사람은 새로운 가능성에 기대를 걸어 보기로 했다. 그러자 서핑에서도 그들은 비범한 재능을 발휘해 순식간에 두각을 드러냈다. 두 사람의 활약을 한 번이라도 보려는 관객들로 인공 해양 수영장은 연일 가득 찼다. 거리에서 이뤄지는 에어스피너의 곡예 주행과 달리, 서핑은 주변 사람들과 건축물에 피해를 끼칠 우려가 없었다. 마치 물 만난 물고기처럼, 둘은 서로를 자극하며 더 대담하고 과격한 기술을 추구해 나갔다. 일렉트로프 기술을 구사해 거대한 파도와 화염을 만들어 내고, 눈이 휘둥그레지는 기예를 선보인다. 상식을 벗어난 그 퍼포먼스는 관객들을 열광시켰다. 곡예 주행을 잃었음에도, 둘은 다시 한번 시대의 총아가 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성공도 또다시 잃게 된다. 어느 날, 딥 블루에게 서핑 경기를 주관하는 남자가 찾아왔다. 그의 말에 따르면 두 사람의 과격한 퍼포먼스에 귀중한 영혼 자원이 낭비되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고 했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레드 핫이었다. 폭발물을 사용해 큰 파도를 일으키는 스타일로 화제를 모았으나, 그만큼 위험도가 높아 몇 번이고 비축된 사람의 영혼을 소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이상 과격함을 계속 추구한다면 비판을 억누를 수 없을 거라고 주관자는 말하더니, 냉담한 어조로 고했다. “그 바보를 버릴 생각은 없나?” 네놈에게 그런 말을 들을 정도로 바보는 아니야―― 딥 블루의 분노가 폭발했다. 정신을 차리니 이미 주먹이 나갔고, 주관자는 의자째 뒤로 나자빠져 있었다. 그 결과, 딥 블루와 레드 핫은 나란히 서핑 경기의 세계에서 추방되었다. 모처럼 손에 넣은 성공은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 버렸다. 바보는 나였던 거야―― 딥 블루는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다. 그날 이후 모든 것을 잃었다. 저축은 바닥을 드러냈고, 살던 곳도 잃었으며, 결국은 길거리 생활까지 추락하고 말았다. 그때 주먹만 휘두르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곁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레드 핫이 태평한 모습으로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었다. “형님, 나름 먹을 만해.” 해맑은 얼굴로 내민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은 음식을 보고, 딥 블루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더는 방법이 없다. 이것이 내 인생의 종착점이겠지. 그렇게 포기하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옷차림이 번듯한 노인이 마치 구세주처럼 둘 앞에 나타났다. 노인은 잠시 말없이 두 사람을 바라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네들, 아르카디아의 투사가 되지 않겠나?” 딥 블루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마음대로 안 되는 인생이었지만, 아무래도 이대로 끝나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게 둘은 드디어 ‘딥 블루’와 ‘레드 핫’이라는 별명을 얻어 아르카디아의 투사가 되었다. 딥 블루가 과거 동경했던, 마물의 영혼을 이용해 싸운다는 꿈은 생각지도 못한 형태로 실현된 것이었다. 게다가 주인은 두 사람의 가치를 정확히 알아보았다. 그들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 있을 때 빛나는 존재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익스트림즈’라는 이름을 얻은 둘은 팀으로서 아르카디아의 링에 섰다. 과격한 전투 방식과 호흡이 척척 맞는 연계, 그리고 상대를 도발하는 악역다운 행동은 순식간에 인기를 끌었고, 아르카디아를 대표하는 악역 투사가 되어 관객들에게 확고한 지지를 얻는 데까지 이르렀다. 오랜 우여곡절 끝에, 딥 블루와 레드 핫은 안식처를 찾은 것이었다. 하지만 둘에게 갑작스럽게 비극이 찾아왔다. 마물의 영혼을 계속 이용한 탓에, 영혼이 침식되어 죽음에 이르는 병인 ‘영혼 침식증’이 발병한 것이었다. 그것은 레귤레이터 덕에 죽음으로부터 보호받아 온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 진짜 죽음이었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위험에 몸을 내던져 왔지만, 그것은 결국 죽지 않을 것임을 알았기에 벌인 놀이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진짜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흥분도 스릴도 사라져 버렸다. 남은 건 깊이를 알 수 없는 공포뿐이었다. “형님…… 나, 죽는 거 무서워.” 레드 핫이 약한 소리를 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딥 블루도 처음으로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살고 싶다고 바랐다. 밤마다 잠에서 깼다. 다음 날 아침, 자신이 아직 살아 있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린드블룸이라는 거대 뱀이 된 주인을 쓰러뜨리고 그 핵으로 특효약을 만드는 것. 하지만 아르카디아의 통합 챔피언조차 린드블룸에게는 당해내지 못했다. 그러던 중 마물의 영혼을 사용하지 않고 싸우는 ‘맨몸의 도전자’에게 희망이 맡겨졌다. 익스트림즈에게 주어진 역할은 맨몸의 도전자를 도발하고, 마음껏 싸우게 함으로써 그 실력을 끌어올리는 것. “이게 우리의 마지막 싸움이 될지도 몰라.” 딥 블루는 레드 핫에게 각오를 담아 말했다. “형님, 모든 힘을 다해 싸우자.” 레드 핫의 말대로, 익스트림즈는 그 한 번의 전투에 모든 힘을 쏟아부었다. 맨몸의 도전자는 레귤레이터도 없이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고 있었다. 그렇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나아가는 모습을 보고 둘은 깨달았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강함이 아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강함이라는 것을. 그 순간, 두 사람의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바뀌었다. 죽음의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자 살아 있다는 감각은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해졌다. 그건 지금까지 추구해 온 ‘가짜 스릴’이 아니었다. 진짜 죽음과 마주한 끝에 있는 진짜 흥분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딥 블루도 레드 핫도, 인생 최고의 흥분과 스릴을 맛보고 있었다. 결국 맨몸의 도전자는 익스트림즈에게 승리를 거두고 다음으로 나아가, 린드블룸을 쓰러뜨리는 데 성공했다. 딥 블루와 레드 핫은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형님, 파도가 일기 시작했어.” 레드 핫의 목소리에 딥 블루는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방금 전까지 거울처럼 고요했던 바다 표면에, 드디어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내 인생은 분명 마음대로는 되지 않았다. 이루지 못했던 꿈도 있고, 잃은 것도 셀 수 없이 많다. 하지만 그 덕에 레드 핫을 만나 익스트림즈가 될 수 있었다. 인생 최고의 흥분과 스릴도 맛볼 수 있었다. “마음대로 안 되네, 라…….” 레드 핫이 입에 담았던 말을, 딥 블루는 작게 중얼거렸다. 인생은 이상적인 파도가 원할 때 찾아오는 인공 해양 수영장이 아니다. 파도는 언제 올지 모르기에 기다릴 가치가 있다. 올라탈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기에 가슴이 고동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파도에 올라탔을 때의 기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간다, 레드 핫!” “어, 형님!” 둘은 동시에 달려 나갔다. 눈앞에서는 진짜 바다가 크게 물결치기 시작하고 있었다. 마치 앞으로 펼쳐질 인생처럼. 마음대로는 안 된다. 그렇기에 재미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