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월의 종언 못다 한 이야기

패치 V7.0 황금의 유산 메인 스토리의 내용 중 일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직 메인 스토리를 완료하지 못한 분께서는 주의 부탁 드립니다.

「구름 사이의 별을 찾아」

무거운 먹구름이 알렉산드리아 하늘을 뒤덮고 있다.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빛 또한 어두운 탓에 마치 영원한 밤이 나라를 통째로 집어삼킨 것 같다고――그녀, 외눈의 기사 젤레니아 트리안타필리는 생각했다. 사람들은 하얀 꽃을 손에 들고 줄을 서 있어, 마치 어둠 속에서 아련히 떠오르는 한 줄기 빛처럼도 보였다. 그러나 그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찬란한 희망 같은 것이 아님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숨이 막힐 듯한 꽃향기, 싸늘한 왕성에 울려 퍼지는 비탄의 목소리. 그리고 영원한 잠에 든 여왕이 누워 있는 관…….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에게 사랑받았던 알렉산드리아의 왕, 스펜 알렉산드로스 14세의 국장이 이제 막 거행되는 중이었다. “스펜 님을 잃은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회색 갑옷을 입은 덩치 큰 남자가 중얼거렸다. 평소의 그답지 않은 작고 나약한 목소리에, 젤레니아는 습한 바람에 나부끼는 갈색 머리칼을 눌러 잡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분이 사랑하신 이 나라를 끝까지 지키는 것, 그게 바로 우리의 사명일 것입니다. 마음을 굳게 드십시오, 기사단장님.” “안다, 알고는 있다만……!” 알렉산드리아 왕국기사단장 오티스 벨로나는 침통한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부단장으로서 그의 곁에 서 있던 젤레니아도 입을 꾹 다문 채, 눈시울을 붉히고 서로에게 기대어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주군과의 기억을 떠올렸다. 왕녀 스펜의 호위로 임명되었을 때, 언니가 생긴 것 같아 기쁘다며 미소 짓던 그녀를 반드시 지키겠다고 굳게 맹세했던 그날. 부모님의 죽음을 애도할 틈도 없이 왕위를 계승하고 불안에 떨던 스펜의 등을 다독이며, 앞으로는 지금보다 훨씬 더 그녀의 힘이 되겠노라고 결의를 새로이 다졌던 그날도. 기억을 떠올릴수록 가슴은 미어졌지만, 그럼에도 젤레니아는 결연한 자세를 무너뜨리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아직 눈물을 흘릴 수 없는 이유가…… 풀어야만 하는 ‘의문’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장을 거치며 날카로워진 감각이 불러온 예감 같은 것이었다. 혹은 단순히, 주군의 죽음으로부터 눈을 돌리고자 했던 결과일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쌓이고 쌓인 묘한 위화감이 어느새 의구심이라는 형태가 되어 그녀에게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스펜 님은 정말로 돌아가신 것일까?’――라고.

시간을 거슬러, 국장이 거행되기 며칠 전. 젤레니아는 스펜을 문병하기 위해 오티스와 함께 왕성 안을 걷고 있었다. 뇌광대전과 재해로 인한 피해 상황, 구조와 복구 진행 현황 등 주군에게 보고할 내용을 조정하다 보니, 어느새 두 사람은 스펜의 방 앞에 다다라있었다. 그곳에는 이미 누군가가 불안한 기색으로 서 있었다. 왕의 가정교사인 밀라라족 남성――투프트였다. 사정을 묻자, 그도 스펜을 문병하러 왔으나 왕의 시녀가 입실을 허가하지 않는다고 한다. 잠시 후, 스펜의 방에서 주치의 선드란이 나왔다. 오티스가 그녀를 불러 세우고 무슨 일이냐고 묻자,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듯 시선을 아래로 떨구곤, 나지막한 목소리로 왕의 승하를 알렸다. “……승하……라고……? 스펜 님께서……?” “그래요……. 그러니 당신들의 입실도 허가할 수 없어요. 부디 물러가 주세요. 이 일은 공식 발표가 있을 때까지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마시고요.” 그럴 리가, 말도 안 돼, 라며 동요하는 투프트를 흘끗 쳐다보더니, 선드란은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떴다. 돌로 된 복도에 맥없이 주저앉는 오티스 옆에서, 젤레니아는 말을 잃은 채 멍하니 서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그녀 안에 남아 있던 한 줄기 냉정함이 의문을 던지고 있었다. 스펜을 괴롭히던 병의 증상이 그토록 갑작스럽게 악화할 수 있는 것이던가? 뇌광대전이 끝날 무렵부터, 알렉산드리아 왕국에는 체내 에테르가 번개속성으로 치우치는 사람이 급증했다. 팔다리에 마비 증상이 나타나 검을 휘두르지 못해 퇴역하는 기사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서서히 몸을 잠식당하고, 이윽고 식사를 하거나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게 되어 죽음에 이르게 되지만, 한편으로는 증세가 급격히 악화해 목숨을 잃었다는 이야기를, 젤레니아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스펜도 할 수 없는 일이 조금씩 늘어나고는 있었지만, 자리에서 일어나지는 못해도 아침이 되면 눈을 떴고, 밤이 되면 잠들었다. 목소리를 내는 것이 어려워졌더라도, 그녀의 또렷한 눈빛은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본 것이 불과 며칠 전인데, 갑작스러운 승하 소식이라니, 젤레니아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또 하나, 그녀의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었지만, 그것을 추궁할 상대는 이미 왕의 침실 앞에서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시간은 흘러, 국장이 거행된 지 6년이 지났다. 왕을 잃은 알렉산드리아 왕국은, 기술 개발 조직 ‘프레저베이션’의 등장으로 힘든 시기를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기사단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젤레니아 역시 매일 업무에 쫓기고 있던 어느 날, 드디어 풀지 못했던 의문과 마주할 기회가 찾아왔다. 경애하는 주군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날, 그곳에 있었던 남자――투프트와 다시 만난 것이다. 여왕 승하 이후 프레저베이션으로 소속을 옮긴 그에게 젤레니아가 몇 번이나 면회를 요청했음에도, 그는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소문을 듣고, 젤레니아는 철마차 역에서 그를 기다리기로 했다. “이제야 만났군요. 저는 당신께 이 질문을 던지기 위해 몇 년을 기다렸습니다.” “그게 무, 무슨 말입니까……?” 투프트는 동요한 기색이 역력했다. “스펜 님이 승하하셨다는 소식을 들은 당신은 이렇게 말했죠. ‘그럴 리가, 말도 안 돼’라고요. 그건 왜였습니까?” “젤레니아 공…… 당신은 지금 가시밭길에 발을 들이려 하고 있는 겁니다. 그만두십시오.” 그러나 앞을 막아선 젤레니아의 굳건한 눈빛에, 투프트는 체념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제 고향은 번개속성 에테르를 막는 장벽을 아직 구축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동포들을 위해 기술을 가져가야 합니다. 선의로 한 제안이 예상치 못한 형태로 이용당하더라도, 그로 인해 해결책이 없는 문제를 미룰 뿐이라고 해도, 불평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란 말이죠.” “실례지만, 그게 무슨 말이죠?” 투프트는 시선을 떨어뜨리고 입을 다물었다. 번개속성 에테르가 강한 환경에서 장벽의 존재 여부는 곧 생사의 갈림길이다. 그 점에서 알렉산드리아 왕국은 예로부터 축복받은 나라였다. 뇌광대전이 일어나기 전부터 장벽으로 보호받았던 데다, 최근 재해로 인한 환경 악화에 대처하기 위해 프레저베이션이 그 장벽을 더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투프트가 고향으로 가져가려는 것은 프레저베이션의 기술이다. 그는 무언가 사정을 알고 있음이 분명하지만, 자세한 내막을 말하려 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기술을 제공받는 처지에서는 불평조차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없는 모양이다. 젤레니아도 국민을 위해 일하는 프레저베이션을 의심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투프트의 말은, 그들 내부에서 벌어지는 어두운 움직임을 분명히 시사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스펜의 서거에 그들이 관여했다면, 그녀는 정말로 죽었는가, 라는 의문에 그렇지 않다는 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젤레니아의 머릿속을 스쳤다. “제 고향 트레노는 알렉산드리아의 영토가 아닌데도 젤레니아 공이 지난 재해 때, 이웃인 제 동포들을 구하기 위해 병력을 파견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걸 압니다. 그 선의에 진심으로 감사하기에 나는 당신이 몹시 걱정됩니다……. 부디 이해해 주세요.” 발길을 돌린 그의 작은 등은 점점 멀어지더니, 이윽고 철마차 승강장 쪽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젤레니아는 그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투프트의 말과 자신의 해석이 옳다면, 이제 남은 길은 프레저베이션을 추적하는 것뿐이라고 젤레니아는 결론을 지었다. 동시에 그녀는, 민중의 지지를 한 몸에 받는 세력을 적으로 돌리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도 알고 있었다. 오티스와 기사단을 끌어들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잊을 수 없는 왕의 자취를 쫓기 위해, 젤레니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독한 길을 선택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다시 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은폐된 정보를 쫓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간신히 얻은 단서도, 젤레니아가 업무에 쫓기는 사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곤 했다. 그런 상황이 몇 번 되풀이된 끝에, 젤레니아는 지금 홀로 왕성 안을 걷고 있다. 이곳은 프레저베이션이 완전히 장악한 구역으로, 지금은 왕국기사조차 출입이 제한되어 있다. 비밀리에 침입하기 위해 조사하던 지하 통로는 끝없이 내리는 비로 침수되어 대부분 못 쓰게 되었지만, 그녀는 남아 있는 경로를 집요하게 찾아내서 마침내 이곳…… 옥좌의 방에 도착했다. 국장을 거행했을 때 가득했던 꽃향기는 없고, 성안에 울려 퍼지는 것은 일렉트로프 기기의 낮은 작동음과 젤레니아의 발소리뿐이다. 복잡하게 얽힌 전선들은 옥좌의 방 중앙에 놓인 관 같은 구조물에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 안을 들여다보니, 그날 이후 조금도 변하지 않은 스펜이 누워 있는 게 아닌가. “스펜 님…….” 젤레니아의 떨리는 손끝이 조심스레 구조물에 닿았다. 기쁨, 불안, 그리고 긴장…… 가슴속에 휘몰아치는 감정의 폭풍을 이성으로 억누르고, 그녀는 기기의 구조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번개속성을 얼음속성으로 변환하는 마법 회로……. 저온 상태로 잠들게 해서 생명을 연장하고 있는 건가?” 해결책 없는 문제를 뒤로 미룬다고 했던 투프트의 말을, 젤레니아는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장치를 멈추면 스펜이 깨어난다는 사실도. 그러나 그녀가 앓는 증상을 치료할 방법은, 아직도 존재하지 않는다. 즉, 깨어나더라도 그 앞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때 등 뒤로 기척을 느낀 젤레니아는, 피할 곳이 없다는 생각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문이 있는 곳을 돌아보자, 그곳에는 경비용 자립형 병기를 대동한 프레저베이션의 기술자――한때 왕의 주치의였던 선드란이 서 있었다. 젤레니아가 스펜이 잠든 방에 도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프레저베이션을 따돌렸기 때문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마찬가지로 거듭되는 정보전에 질린 상대방이, 이번에야말로 끝을 내기 위해 일부러 단서를 흘려준 것이었음을 그녀는 이 순간에 비로소 깨달았다. “……두 가지 정도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애초에 이 상황은, 스펜 님이 원하신 일입니까?” “이상한 질문이군요. 말도 못 했던 스펜 왕에게 의사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젤레니아의 마음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스펜에게 말을 건넬 때마다, 그녀는 늘 눈빛으로 대답해 주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에게 의사를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니. 하지만 이제 와서 과거의 일을 왈가왈부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선드란에게 분노를 쏟아낸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 젤레니아는 깊게 숨을 내쉬며 감정을 다스린다. “……그렇다면 스펜 님을 저온 상태로 잠들게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당신들이 지금 그분의 병을 연구하고 있지 않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치료법이 확립되길 기다리고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요.” “스펜 왕의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서……. 그것만 있으면, 머지않아 스펜 왕은 영원히 살 수 있다고 ‘그분’께서 말씀하셨거든요. 원래는 승하를 공표했을 때, 영혼과 함께 기억을 추출한 후 육체는 폐기할 생각이었지만, 더 확실하고 안전하게 기억을 보관하기 위해 이 방법을 택한 것뿐이에요.” 기억이 남아있는 한, 생명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그 말이 젤레니아의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그것은 기억이라는 정보를 저장하라는 뜻은 아니다. 결국 프레저베이션이 스펜의 기억으로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까지는, 젤레니아는 끝내 알 수 없었다. “질문은 두 가지라고 했죠?” 자립형 병기의 총구가 그녀를 겨눈다. 젤레니아는 기사다. 얼마든지 피할 수도, 싸울 수도 있다. 그러나 등 뒤에 잠들어 있는 주군을 이 싸움에 끌어들이는 것이 무엇보다도 두려웠다. 그녀는 검으로 향하던 손을 멈추어 주먹을 쥐고, 감내하기로 한 고통을 느끼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정적 속에서 기기의 낮은 작동음을 들으며, 이 장치를 멈추지 않은 것이 올바른 판단이었는지 젤레니아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가 이제 와서 무엇을 어찌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설령 세계가 먹구름에 뒤덮이더라도, 그 구름 사이에서 별을 찾는 기쁨이 있다. 언젠가 그 희미한 빛이 자신을 이끌어 주기를 기도하면서, 젤레니아는 눈을 감았다.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