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월의 종언 못다 한 이야기

패치 V6.0 효월의 종언 메인 스토리의 내용 중 일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직 메인 스토리를 완료하지 못한 분께서는 주의 부탁 드립니다.

「삭월의 약속」

그날, 르베유르 저택에서는 대대적인 가구 재배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근동 사베네어 섬에서 오는 유학생을 받아들이기 위해 호스트를 자처한 아멜리앙스 르베유르의 지시 아래 객실 하나를 다시 꾸미려는 것이다. 우아한 응접 가구 세트를 밖으로 빼고 고급스러운 침대를 안에 넣는 식으로, 최근 몇 년 동안은 손님과의 간담 등에 이용되던 방이 순식간에 학생이 지낼 수 있는 곳으로 변했다. 모든 작업이 끝나자, 아멜리앙스는 만족스럽다는 듯 방안을 둘러보다가 ―― 문득 알아차렸다. 벽 쪽에 있는 오래된 책상의 서랍이 살짝 열려 있었다. 새로운 가족을 맞을 테니까 마무리는 완벽하게. 그렇게 생각한 아멜리앙스는 서랍 손잡이를 잡고 밀어보았으나 무언가 걸려 있는 듯 좀처럼 안으로 들어가질 않는다. “오래된 가구라서 그런지 아무래도 수리를 맡겨야 할까 봐.” 불쑥 흘러나온 혼잣말대로 이 책상은 골동품의 부류에 속하는 물건이었다. 선대 당주 루이수아의 어린 시절에 구입한 것인데, 그 아들인 푸르슈노에게, 그리고 또 그 아들인 알피노에게, 3대에 걸쳐 르베유르 가의 남자에게 물려져 내려왔다. 덜거덕거리는 것도 당연하다. 혹시 몰라 서랍을 책상에서 빼내어 보고 아멜리앙스는 그제야 이유를 알게 되었다. 상판 뒤쪽에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비밀 공간이 있었는데, 거기서 떨어진 뚜껑이 서랍을 막고 있었다. 장난기 많기로 유명했던 루이수아 님의 물건다웠다. 그렇지만 아멜리앙스의 장난기도 만만치 않다. 비밀 공간을 찾았으니 그 안을 엿보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그녀는 한 권의 가죽 수첩을 발견하게 된다. 대체 무엇이 쓰여 있을까? 무심코 연 페이지의 첫 줄에 적혀 있는 것은 낯익고 꼼꼼한 글씨로 기록된 날짜――그건 그녀의 아들 알피노가 어린 시절에 쓴 오래된 일기였다.

훗날 사람들이 ‘제6성력의 마지막 해’로 인식하게 되는 1572년. 북해에 늦은 봄이 찾아온 별빛3월 1일의 일이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당시 알피노 르베유르는 남아도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진학을 희망하던 샬레이안 마법대학으로부터 합격 통지는 받았지만, 실제로 입학하려면 학기가 시작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학원 공부도 다 끝내 버린 그는 붕 뜬 상태가 되었다. 게다가 아쉽게도 그날은 아침부터 할아버지 루이수아가 집을 비웠다. 여동생 알리제가 할아버지와 함께 장을 보러 나가버린 것이다. 경애하는 조부 루이수아가 에오르제아로 건너갈 예정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는 되도록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여동생에게 선수를 빼앗긴 셈이다. 할 일이 없어 따분해진 그는 정원에서 독서라도 할까 싶어 현관으로 가다가 막 외출하려는 아버지 푸르슈노와 마주쳤다. “아버지, 외출하십니까?” “그래, 시찰하러.” 너무나도 짧은 대답은 11살짜리 아들에게 한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으나 알피노가 한 대답도 어린아이답지는 않다. “휴일에도 일하러 나가다니 수고가 많으시네요.” “아니, 오늘 가는 시찰은 철학자 의회 용건이 아니라 사적인 일이다.” 이것이 신동이라고 불리는 소년과 그 아버지의 일상적인 대화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아이다운 모습이 전혀 없는가 하면 절대 그렇지는 않았다. 공무가 아니라는 것을 들은 알피노는 마치 자신도 놀러 가고 싶다는 듯 동행 허락을 구했다. 푸르슈노가 잠시 고민한 후에 허락하자, 그는 행선지도 모른 채 아버지와 함께 외출하게 되었다. 도중에 알피노는 아고라의 외곽에서 뾰로통한 얼굴로 쭈그려 앉아 애견 안젤로의 머리를 쓰다듬는 알리제를 발견했다. 바로 옆에는 지인들에게 둘러싸인 루이수아의 모습이 있었다. 마법대학의 몽티셰뉴 학장을 필두로 고고학부의 루루샤 교수, 마법학부의 네네리모 토토리모 교수까지 있으니, 이야기가 길어질 것이 뻔했다. 여동생의 불운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알피노는 앞서 걸어가는 아버지의 뒤를 쫓았다. 몇 분 뒤, 부자는 지식의 도시에서 가장 해발고도가 높은 언덕 위에 있는 ‘철학자 광장’ 앞에 서 있었다. 아니, 전 광장이라고 해야 할까? 과거에는 정말로 원형 광장이 있어 모든 시민이 모여 정책을 논의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시민을 대표하는 99명의 의원이 모일 수 있는 의사당이 엄연히 세워져 있으니 말이다. 철학자 의회의 일원인 푸르슈노에게는 이곳이 직장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공무도 아니라면서 올 만한 곳은 아닌 것 같다고, 알피노는 의문스럽게 생각했다. “이쪽이다. 따라오너라.” 아버지 푸르슈노는 여전히 긴 말을 하지 않고 앞서 걷는다. 왼쪽 입구를 통해 의사당 안으로 들어가서는 계단을 내려가 지하실로 향한다. 그곳에는 경비가 삼엄한 문이 있지만, 이 의사당 내에서 푸르슈노의 얼굴을 모르는 자는 없다. 순조롭게 방문 수속을 마치고 문이 열리자 두 사람은 실내로 들어간다. 들어가자마자 방금 열렸던 문이 닫히며 실내 전체가 흔들거리는 것을 보고 알피노는 지금 있는 곳이 승강기 안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 설마 여기는……” “그래. 너도 이 도시 지하에 건설된 라비린토스 이야기는 들어봤겠지.” 분명 들어본 적이 있다. 샬레이안 본섬은 화산섬으로, 도시의 깊은 지하에는 과거 용암이 고여 있던 흔적이라는 거대한 동굴이 존재한다. 그곳을 세계 각지에서 모은 자료와 생체 샘플 보관고로 이용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사전에 개요를 알고 있었다고 해도 승강기에서 내린 알피노는 놀라운 광경에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바로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일까? 올려다보면 허구의 하늘이 있고 인공 태양이 빛나고 있다. 멍하니 서 있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푸르슈노는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대단하지? 며칠 전, 지연되고 있던 마지막 송풍탑이 완성되어 시험 작동을 했거든. 그 상황을 확인해 두고 싶었다.” 머리칼을 스치는 부드러운 바람을 느끼고 알피노는 바람이 부는 곳을 찾듯이 달려 나갔다. 성채에서 몸을 내밀며 아래쪽을 내려다보니 도저히 지하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녹지가 펼쳐져 있다. “굉장해…… 마치 북해가 아닌 것 같아!” 눈을 반짝이는 아들 옆에 아버지가 선다. “온난하고 살기 좋은 일사바드 대륙 남부, 코르보 지방의 기후를 재현했단다. 제국인은 그 땅을 이상향이라는 뜻을 가진 로쿠스 아모에누스라는 이름으로 부른다는데 그 마음을 알 것도 같구나. 전쟁을 좋아하는 야만인들과 견해가 일치하는 일이 드물기는 하지만.” 푸르슈노가 말을 많이 하는 경우는 드물다. 무심코 자랑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이 환경을 만들어내는 과정에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으리라. 그 후, 알피노는 아버지를 따라 로기스티콘 알파를 방문했다. 라비린토스의 기후를 관리하는 시설이다. 지적 호기심이 넘치는 소년에게 최신 기술이 담긴 장소를 둘러보는 체험은 그야말로 설레는 일이었다. 더 보고 싶고, 더 알고 싶다.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바랐다. “아버지, 저쪽으로도 가 봐요!” 모든 시찰 행정을 끝내고 시설을 나오자마자 알피노는 북쪽으로 나 있는 숲길을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푸르슈노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한다. “시찰은 여기까지다. 집에 가자.” 순간 알피노는 장난감을 빼앗긴 어린아이 같은 표정이 되었지만 그는 말귀가 밝았다. 곧바로 실망한 모습을 감추고자 표정을 관리했다. 그는 위대한 아버지에게 걸맞은 아들이 되고자 마음먹고 있었다. 하지만 뜻밖의 지원군이 찾아왔다. “뭐, 어때요. 마침 나들이 가기에도 딱 좋은 날씨인데요!” 목소리의 주인공은 아멜리앙스였다. 양손에 하나씩 큰 바구니를 들고 있다. “휴일인데 다들 나만 빼놓고 나가다니 너무한 거 아닌가요? 용서해 줄 테니, 대신 내 말은 다 들어줘야 해요?” 아멜리앙스가 웃으면서 한 말은 협상이 아니라 일방적인 통보였다. 이렇게 되면 샬레이안의 정치를 움직이는 유력 의원이라도 대꾸할 수 없다. 조금 뒤에 아멜리앙스의 제안을 받은 걸로 보이는 루이수아와 알리제도 애견 안젤로와 함께 나타나, 결국 온 가족이 다 같이 사잇둘레로 나들이를 온 셈이 되었다. 얼마 전 완성된 프네우마 송풍탑에서 불어오는 바람 아래, 풀밭에 돗자리가 펼쳐지고 바구니가 열렸다. 물통 뚜껑이 열리니 구수한 홍차 향이 감돌기 시작하면서 라스트 스탠드에서 사 온 간식에 풍미를 더했다. 샬레이안 최고의 명문가 사람들이 모여 있는 모습은 싫든 좋든 눈길을 끌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주로 연구자들이었다――이 인사를 하려고 걸음을 멈추었고 종내에는 이 나들이에 참여하려고 하는 자마저 나오기 시작했다. 선두를 끊은 것은 발데시온 위원회의 대표를 맡고 있는 갈러프였다. 양녀라는 라라펠족 소녀를 데려와 알피노와 알리제에게 인사 시켰다. 그녀가 샬레이안 마법대학에 재학 중이라는 것을 알자, 아멜리앙스는 후배로 입학하게 될 아이들을 잘 부탁한다며 인사하고 홍차를 따라 대접했다. 그녀, 쿠루루 발데시온은 찻잔을 받아 들고는 활짝 웃으며 쌍둥이의 대학 생활을 도와주겠다고 흔쾌히 약속했다. 뒤이어 온 사람은 루이수아의 제자들――쾌활한 문브뤼다 윌선윈과 말수가 적은 위리앙제 오귀레다. 단란한 가족 모임을 방해할 수 없다며 사양하는 위리앙제를, 연회는 사람이 많을수록 즐거운 법이라며 문브뤼다가 억지로 끌고 와 앉혔다. 결과적으로 처음엔 소극적이었던 위리앙제가 더 열정적으로 루이수아와 예언시로 토론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자리에 끼고 싶었던 사람은 오히려 그였던 모양이다. 그 밖에도 수많은 사람이 찾아왔다. 푸르슈노 주위에는 어느새 철학자 의회에 소속된 명사들이 모여 있었다. 루이수아와 위리앙제에게 고대 알라그 문명에 관한 자신의 가설을 뜨겁게 설명하고 있는 사람은 구세시맹에도 이름이 올라가 있는 람브루스 씨다. 아멜리앙스에게 추가 주문을 받고 라비린토스까지 배달 온 라스트 스탠드의 딕콘 점장도 어느새 자리를 잡고 구운 과자를 맛있게 만드는 법에 대해서 열정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들의 나들이는 밤이 되었음을 알리기 위해 인공 태양의 빛이 꺼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 희미하게 빛나는 수정구는 태양과 달이 겹친 삭월을 연상시켰다.

살며시 수첩을 닫고 아멜리앙스는 눈을 감았다. 뇌리에 떠오른 장면은 그 나들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루이수아와 푸르슈노, 그리고 알피노가 했던 말이다. “이제 마음 놓고 별을 위해 걸어갈 수 있겠구나.” 그 말에서 제7재해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에오르제아로 건너가려는 루이수아의 결심이 느껴졌다. 죽음마저 각오하면서 여행을 떠나기 전, 사랑하는 가족 및 친구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진심으로 기뻤을 것이다. “저는 제 길을 가겠습니다. 아이들이 걸어야 할 길을 만들기 위해.” 지금 돌이켜 보면 푸르슈노는 ‘별에서 대이동’이라는 숨겨진 사명이야말로 아이들이 살아남기 위한 방법이라 믿고 다른 길을 걷겠노라고 아버지에게 선언했던 것 같다. 루이수아는 입을 다물고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이. “저도 계속 걸어가겠습니다. 언젠가 조부님과 아버지께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마법대학 입학을 앞둔 그때의 알피노의 말은 다른 뜻이 없는 순수한 마음이었겠지만, 아멜리앙스는 알고 있다. 알피노는 동생 알리제와 함께 할아버지 루이수아의 뒤를 쫓아, 아버지 푸르슈노가 만든 길을 따라, 동료들과 함께 별을 구했다. 그렇다. 그들은 모두 약속을 지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