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저베이션에 관한 조사도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서, 최근에는 늦은 밤 백룸에 남아 있는 사람도 드물었다. ‘격납동 10-29’에 남겨진 데이터 정리를 끝내고 야슈톨라에게 정기 연락까지 마친 셰일은 홀로 레귤레이터를 손에 쥔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기억 복원. 최근 조사를 통해 레귤레이터 착용자는 죽은 자에 대한 기억이 ‘봉인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리빙 메모리의 메인 터미널을 경유해 봉인된 기억을 복원하는 기술을 완성해 낸 것은 오블리비언과 거번먼트의 연계, 그리고 무엇보다 셰일의 집념에 가까운 기술 검증 덕분이었다. 셰일 자신도 레귤레이터를 착용했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는 소중한 누군가를 잃었다는 감각만 있었을 뿐, 그 사람이 누구였는지, 자신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자포자기에 빠질 만큼 가슴에 깊은 그늘을 드리웠던 기억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동안은 바쁘다는 핑계로 기억 복원을 미루고 있었지만, 이제는 마주해야만 했다. 이미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이다. 셰일의 가슴속을 차지하고 있는 이 기억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자, 그럼 마중을 나가 볼까. 나와 그녀의 기억을…….” 셰일은 잔에 담긴 술을 단숨에 입 안에 털어 넣고 자신의 기억 복원을 시작했다.
이미 자정을 훌쩍 넘었음에도, 번화가는 평소와 다름없이 떠들썩했다. 셰일은 자신이 일하는 가게를 나와 뒷골목에 주저앉아 술병에 입을 대고 들이켰다. 그대로 눈을 감으니, 공허한 졸음이 정신과 육체를 잠식하는 감각이 밀려들었다. 장벽 안에서 나고 자란 셰일은 철이 들었을 때부터 이미 부모라는 존재가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부모의 기억 자체가 없었다. 레귤레이터 때문에 봉인된 것인지, 너무 어릴 적의 일이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인지, 당시의 셰일에게는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무언가를 ‘잊는다’는 것이 너무나도 불쾌했다. 마치 자신의 일부를 억지로 도려내는 듯해 견디기 힘들었지만, 그렇다고 레귤레이터를 떼었을 때 감수해야 할 불이익까지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일렉트로프는 좋아한다. 정보를 정확하게 기록해 줘서 잊어버릴 염려도 없다. 그럼에도 누군가가 죽으면 기억은 구름 위로 맡겨져 버린다. 그래서 타인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을 자연스럽게 피하게 되었다. 친하면 친할수록, 그 사람이 떠났을 때 빼앗기는 기억 또한 그만큼 많아질 테니까. 그러다 보니, 어느새 타인이라는 존재에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다. 일렉트로프 기술에 소질이 있어 성인이 된 뒤 한동안 기술자로 일했지만, 걸핏하면 참견해 대는 귀찮은 동료에게 진절머리가 나 일찌감치 그만둬 버렸다. 그저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며, 좋아하는 일렉트로프와 에어스피너를 만지작거릴 수 있을 만큼의 벌이만 있으면 충분했다. 그러다 유흥가에 위치한 바의 사장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적당히 억지웃음만 지어 보이면 그만인 손님들과의 거리감이 생각보다 편해, 한동안 그 가게에서 일하기로 했다. 휴식 시간이 되면 뒷골목에 나와 혼자서 술을 들이켜고 잠시 눈을 붙이는 것 또한 늘 반복되던 일상―― 그런 나날이 맥없이 무너져 버린 어느 날의 일이었다. “어머나, 이런 데서 자고 있으면 위험하잖아!” 그 말이 자신을 향한 것이란 걸 생각지 못하고 그대로 눈을 감고 있었더니, 손에 들고 있던 술병을 빼앗겼다. 귀찮게시리, 주정뱅이한테 걸린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떴더니 눈앞에 긴 흑발 사이로 금빛 가닥을 땋아 넣은 셔토나족 여자가 쪼그려 앉아 있었다. 머리에 레귤레이터를 달지 않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이쪽을 똑바로 쳐다보는 황금빛 눈동자가 눈부셔서,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떴다. “……쳇, 너하고 무슨 상관이야. 술이나 돌려줘.” 셰일은 퉁명스레 툭 내뱉고는 빼앗긴 술병을 낚아챘다. 그리고 남은 술을 단숨에 들이켜자, 여자는 대놓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 근처에 소매치기가 얼마나 많은데, 그렇게 무방비하게 있으면 위험하다니까!” “……시끄러워. 그딴 절도범 정도야 금방 추적할 수 있어. 나한테 개인정보 털리고 싶지 않으면 너도 내 일에 신경 끄시지.” 쫓아버리려는 생각에 그렇게 말하자, 여자는 흥미롭다는 듯 이쪽을 빤히 바라보았다. “오호라…… 혹시 당신, 일렉트로프 조작 잘해? 마침 내가 실력 좋은 프리랜서 기술자를 찾고 있거든!” 반짝이는 황금빛 눈동자가 한층 더 눈부시게 빛나고 있어, 아차 싶었을 때는 이미 늦고 말았다. “난 카흐키와야. 당신 말이야, 나랑 손잡지 않을래?” 잔뜩 들뜬 얼굴을 한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런 터무니없는 제안이었다. 저도 모르게 손에서 미끄러져 떨어진 빈 병이 어둠 속으로 데굴데굴 굴러가는 것을 흘끗 바라본 후, 셰일은 단호하게 말했다. “싫어.” 그 뒤로 카흐키와라는 여자는 매일같이 셰일이 일하는 가게에 찾아왔다. 올 때마다 제안을 해왔고 그때마다 거절했다. 그런데도 언제나 즐겁다는 얼굴로, 먼 곳에서 일하고 있다는 아들 이야기며 셰일이 그 아들과 어딘가 닮았다는 이야기, 그리고 카흐키와 자신이 좋아하는 동물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어느 날, 카흐키와는 셰일에게 어떤 칵테일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다. ‘황야의 태양’이라는 이름의 그 칵테일은 카흐키와가 고향에서 마시던 술이라고 했다. 태양이라는 것을 본 적은 없었지만, 완성된 칵테일은 카흐키와의 눈동자 색을 꼭 닮은 황금색을 띠고 있었다. “크~ 이거야, 이거! 가끔은 바깥 세계의 태양이 그리워진다니까.” 카흐키와는 만족한 듯이 잔을 입가에 가져가며 웃었다. “……난 모르겠는데. 바깥 세계라는 게 그렇게 좋은 건가?” “나한테는 그래. 무엇보다, 바깥은 미지로 가득 차 있으니까! 100년도 넘게 살았지만, 내가 아는 건 겨우 한 줌뿐이야. 온 세상을 여행하면서, 태양 아래 사는 미지의 생물을 알아가는 게 내 꿈이지만, 아마 평생을 바쳐도 전부 다 알지는 못할 거야. 그래도 만약 우리 아들이 내 꿈을 이어준다면 그보다 기쁜 일은 없겠지!” 그리 말하며 웃는 카흐키와를 보자 마음속 깊은 곳이 환해지는 듯해…… 셰일은 아주 조금이나마 ‘태양’이라는 것에 마음이 끌렸다. 그렇게 동료가 되어 달라고 끊임없이 매달리는 카흐키와와 매번 거절하는 셰일의 소모적인 실랑이가 이어지던 어느 날, “그럼 하루라도 좋으니까 일해 줘. 그러면 포기할 테니까.”라고 말하는 카흐키와의 제안을, 그렇게까지 말하니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셰일은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만나기로 한 곳은 에버킵을 벗어난 바깥, 헤리티지 파운드였다. 목적지까지 좀 거리가 있으니 뒤에 태워 주겠다고 말하길래, 카흐키와도 에어스피너를 타는 걸까 궁금해하며 기다렸다. 하지만 카흐키와와 함께 나타난 것은 로네크라는 이름의, 기묘한 생김새의 동물이었다. 카흐키와 말로는 땅이 융합된 후 살아남은 마지막 한 마리라고 했다. 물론 셰일은 동물의 등에 타본 적이 없었다. “지금 장난해? 이런 걸 어떻게 타라고……!” “괜찮아, 잔말 말고 타! 빨리 안 타면 두고 간다, 셰일!” 이럴 줄 알았으면 내 차를 끌고 올 걸 그랬다고 뼈저리게 후회했지만, 선금을 받아 버렸으니 이제 와서 무를 수도 없었다. 셰일은 재촉하는 카흐키와의 손을 붙잡고 간신히 로네크의 등에 기어오르듯 올라탄 뒤, 떨어지지 않으려 죽을힘을 다해 카흐키와에게 매달렸다. “히익…… 조, 조금만 천천히 달려!!” “아하하하하하하! 아이, 즐거워라!” 이쪽의 요구 따위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신이 나서 로네크를 모는 카흐키와. 그렇게 지옥 같은 시간이 지나 도착한 곳은 선더야드에 위치한 ‘하늘갱도’라는 이름의 동굴 앞이었다. 이 폐광 안에 카흐키와가 가져온 일렉트로프 기기가 있으니 그것을 봐 달라고 했다. 활로 마물을 쓰러뜨리며 앞장서 걷는 카흐키와의 뒤를 따라, 어둠 속을 몇 분쯤 걸었을까, 마침내 오늘의 ‘일터’에 도착했다. 희미한 불빛에 의지해 주위를 둘러보니, 연식이 오래된 일렉트로프 기기가 쌓여 있었다. 들어 보니, 표류종점의 지인에게서 있는 대로 모조리 넘겨받은 기기들이라는데, 이미 수리는 마쳤지만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조사해 달라는 것이었다. 살펴보니 아무래도 그것은 일종의 수신기 같았다. 대응하는 송신기만 있으면 꽤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영상을 수신할 수 있을 것이다. “……목적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보수를 받을 수 있다면 앞으로도 도와줄 수 있어.” 희귀한 일렉트로프 기기를 보고 마음이 들뜬 탓이었을까, 자기도 모르게 그런 제안을 꺼내고 말았다. 그것은 스스로도 뜻밖일 정도로 처음 느껴보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감정에서 나온 말이기도 했다. 카흐키와는 약간 놀란 듯한 얼굴로 이쪽을 돌아보더니,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용도를 알아낸 걸로 충분해. 더 이상 내 일에 널 끌어들일 순 없지.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할게. 고마워, 셰일.” 골치 아픈 일에 말려드는 건 귀찮았지만, 기껏 제안했는데 거절당하니 왠지 약이 올랐다. 그럼 적어도 목적이라도 알려 달라고 물고 늘어지니, 불만이 전해진 모양인지 카흐키와는 재미있다는 듯 푸훕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주변에 쌓여 있는 나무 상자에서 과거에 광부들이 남긴 것으로 보이는 와인과 잔 두 개를 꺼내 근처 탁자 위에 놓았다. “그럼 잠시만,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해도 될까?” 그렇게 카흐키와가 꺼낸 것은 죽음 이후에 대한 이야기였다. 모든 생명에는 끝이 있고, 이윽고 새로운 생명이 되어 다시금 세상에 돌아온다. 셔토나족인 카흐키와는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을 존중하고, 삶과 죽음 모두를 거대한 순환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카흐키와가 지키고 싶은 것은 결국 그 자연의 순환인 듯했다. 사랑하는 아들이 살아갈 세상에서, 생명의 순환이 올바르게 이어질 수 있도록…… 그러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있노라고. 레귤레이터를 장착한 셰일에게는 죽음이라는 것이 잘 와닿지 않았다. 하지만 애정을 담아 이야기하는 카흐키와의 황금빛 눈동자가 지금까지 본 그 어떤 것보다도 아름다웠기에, 그녀의 이야기가 무척 아름다운 진리처럼 느껴졌다. 동시에,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공포도 함께 느꼈다. 만약 레귤레이터를 장착하지 않은 카흐키와의 생명이 앞으로 사라져 버린다면 치열하게 살아온 삶의 증거도, 아들을 위해 품었던 열정도 구름 위에 맡겨지는 일 없이 언젠가 흔적도 없이 잊히고 마는 것일까.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 마음을 털어놓자 카흐키와는 자애로운 얼굴로 말했다. “잊는 것도, 잊히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야. 아무리 소중한 사람의 기억이라 해도, 시간이 지나면 그 얼굴도 목소리도 향기도 조금씩 희미해지는 법이거든. 그런데도 난, 기억해 두고 싶다는 집착이야말로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해. ……뭐, 레귤레이터를 달든 안 달든, 잊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그러니 마음에 담아둘 필요는 없어! 분명 언젠가 또 돌고 돌아서 소중히 여겨준 사람의 곁에 이르게 될 거야. 그럼 다시 처음부터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가면 돼.” 하지만 그때의 셰일은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위험한 일을 할 거라면 적어도 레귤레이터만큼은 장착해 달라고, 술기운을 빌려 간절히 부탁해 봤지만 카흐키와는 쓴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생각해 볼게.” 그 뒤로, 셰일은 자발적으로 ‘하늘갱도’를 찾아가 카흐키와에게 일렉트로프 기기 조작법을 가르쳐 주었다. 어느 날 기계병에게 들켰다며 부상을 입고 돌아온 카흐키와를 보고 셰일은 자신도 동료로서 도울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전에 없이 진지한 태도를 보고 그 각오가 진심이라는 걸 알아차렸는지, 카흐키와는 ‘조라쟈 왕을 막는다’는 너무나도 위험한 목적을 알려 주었다. 하지만 셰일에게 허락된 건 카흐키와가 조사를 나갈 때 후방에서 지원하는 일뿐이었다. 싸울 수 없는 자신이 답답했지만, 그녀는 언제나 고맙다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 그날은 마침내 조라쟈의 집무실로 이어지는 경로를 찾아내어 카흐키와가 혼자 정찰을 떠나는 날이었다. 불안한 마음에 몹시 걱정하는 셰일에게, 슬슬 동료도 늘려봐야겠다고 말하며 카흐키와는 자신의 머리에 레귤레이터를 장착했다. 그것은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기를 원했던 카흐키와가 오로지 셰일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한 행동이었다. 말문이 막혀 버린 셰일에게, 카흐키와는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조직을 만들려면, 너도 존댓말이란 걸 좀 배워야겠다. 그렇게 태도가 퉁명스러우면 다들 무서워할지도 모르니까.”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리자, 카흐키와는 크게 웃으며 ‘하늘갱도’를 떠났다. 카흐키와의 레귤레이터 반응이 추적망에서 사라진 것은 그로부터 몇 시간 뒤였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 셰일은 반사적으로 자신의 레귤레이터를 벗어 던졌다. 하지만 이미 카흐키와에 대한 것도, 함께 보낸 시간도, 그녀에게 품었던 마음도…… 셰일은 모두 잊어버리고 말았다. 가슴 한가운데가 도려내진 듯, 늘 피를 흘리고 있는 것 같았다. 분명 자신이 소중한 누군가를 잊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았다. 자포자기에 빠져 술에 절어 살았고, 분을 삭이지 못한 채 닥치는 대로 시비를 걸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우연히 가게를 찾은 푸른 머리의 휴네족 청년과 주먹다짐을 한 끝에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자, 눈앞에 괴상하고 동그란 기계 하나가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나 참, 못 말려. 이런 데서 자고 있으면 위험하잖아!” 그것은 왠지 모르게, 애가 탈 정도로 그리운 목소리여서―― 괜히 참견하지 말라며 쏘아붙이는 셰일의 뺨 위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천천히 눈을 뜨고 흐릿하게 번져 보이는 백룸을 뒤로했다. 솔루션 나인을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까지 비틀거리며 걸어간 셰일은 호흡을 가다듬듯 천천히 숨을 내쉬고는 레귤레이터를 뗐다. ‘다시 시작’하기 이전의 기억을 알려주지 않은 건, 망각을 두려워했던 셰일을 위한 배려였을까. 아니면 자연의 순환을 소중히 여기던 카흐키와 나름의 새로운 출발이었을까. 어느 쪽이든, 카흐키와는 다시 셰일의 곁에 돌아와 있었다. 마치 장난이 성공한 것처럼 호쾌하게 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아,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온다. ――그래, 그녀는 줄곧 여기에 있었다. 정말이지 당해낼 수가 없다니까. 하지만…… “이건 당신이 남겨준…… 나의 진정한 프롤로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