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월의 종언 못다 한 이야기

패치 V6.0 효월의 종언 메인 스토리의 내용 중 일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직 메인 스토리를 완료하지 못한 분께서는 주의 부탁 드립니다.

「붉은빛 해후」

“라하, 네 앞으로 편지 왔어.” 종말 소동이 가라앉은 지 한참 지난 어느 날, 잔잔한 바람이 부는 오후 무렵. 조금 늦은 점심 식사를 마치고 발데시온 분관에 돌아온 그라하 티아에게 쿠루루가 그렇게 말하며 한 통의 편지를 내밀었다. 위원회가 아니라 라하 개인 앞으로 온 것이라면 몹시 드문 일인데, 정말로 봉투 겉에는 정갈한 에오르제아 문자로 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보낸 이의 서명은 없다. 접수처에 있는 오지카에게 종이칼을 빌려 봉투를 열고 내용을 훑어본 라하는 저도 모르게 깜짝 놀라 ‘앗’하고 소리를 질렀다. 쿠루루와 오지카가 나란히 이쪽을 쳐다본다. 라하는 확인하듯 다시 한번 내용을 들춰보고는 곤혹스러운 듯이 대답했다. “묻고 싶은 게 있으니 괜찮다면 이쪽으로 와 주겠냐는데…… 도마의 히엔 공이.” “히엔 님? 그 히엔 님이? 왜 라하를?” “내가 묻고 싶어. 그 사람을 데리고 오라는 거면 또 모르겠는데…….” 편지를 뒤집어도 보고 빛에도 비추어 봤지만, 암호가 숨겨져 있는 것 같지도 않다. 그렇다면 편지지에 거침없이 쓰여 있는 내용에 별다른 뜻은 없을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인지 생각하는 뇌리에, 그 모험가가 도마에 대해 말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상대가 상대인 만큼 거절할 수도 없겠지.” 그것 말고는 다른 동기가 없다는 것을 거듭 못 박듯 말하니, 이번에는 두 사람이 라하를 향해 슬며시 웃음을 짓는다. 라하는 약간의 긴장과 큰 기대를 가슴에 품고 일정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쿠가네를 경유해 이사리 마을로 건너가 미리 준비한 배로 무이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도마 도읍지에 도착하니, 하쿠로라는 이름의 인랑족 무인이 허리를 숙여 동방식으로 인사하며 맞아주었다. 그의 꼬리를 쫓듯이 큰길을 지나간다. 양쪽에 늘어서 있는 돌담에는 특징적인 원형 문과 부채꼴 모양의 작은 창문이 있었고 그 너머로 장인들의 공방 같은 장소가 엿보였다. 창문 너머로 장인이 일하는 모습이 보일 때마다 마음이 이끌렸으나 라하는 애써 앞을 바라보았다. 안내받은 곳은 길 끝에 있는 유달리 멋진 건물이었다. 원래는 마을의 현청이었지만, 현재는 히엔의 저택이 되어 ‘귀연관’이라 불리고 있다고 한다. 안으로 들어가 잠시 복도를 걷는다. 오래된 건물이라 그런지 아니면 향이라도 피우고 있는 건지, 초목을 연상시키는 깊은 이국의 향이 났다. 갑자기 긴장되기 시작했다. 동방의 예의범절을 마음속으로 복습하면서, 일단 등을 쭉 폈다. 무릇 기품이나 품격과는 거리가 멀었던 라하가 어느 도시의 수장이 되어야 했던 시절에 ‘이것만큼은’이라고 마음에 새기고 있던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고, 그 너머에 라하를 부른 당사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잘 왔네. 이렇게 먼 곳까지 오라고 해서 미안하군.” 리진 가문의 히엔은 그렇게 말하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와는 이전에 각국 맹주들와 함께 텔로포로이 대책을 강구할 때 만난 적이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제8재해가 일어난 후의 미래에서도 그가 어떻게 살았고 그 영웅에 대해서 다음 세대에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전해주었는지 알고 있지만…… 이 역사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는 일, 라하는 조용히 입을 다문 채 ‘새벽’의 신입으로서 인사를 나눴다. 이전에도 다른 맹주들 못지않은 박력이라고 느꼈지만, 이렇게 자국의 문양을 뒤에 두고 수묵으로 그려진 냉엄한 얀사의 자연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은 실로 당당하다. 도마가 제국 식민지가 된 다음 해에 태어났다고 하니 라하와는 동갑이다.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 관록이야말로 여의찮은 환경에서 살아온 그의 노고를 짐작할 수 있게 했다. “초대해 줘서 고맙다. 그런데 정말로 내가 와도 되는 거였나?” “물론일세. 그대에게 긴히 묻고 싶은 것이 있네.” 권하는 대로 마주 앉아 가볍게 여행의 감상을 나누고 나서 히엔의 용건을 듣는다. 들어보니 갈레말 제국과의 관계에 변화의 조짐이 있는 모양이다. 예의 나라와 발빠르게 통상을 재개한 라자한의 주관 아래 제국 측 핵심 인물과 관계 각국의 대표 간 회담의 장이 열리게 되었다. 그곳에 참석하게 된 히엔으로서는, 회담을 순조롭게 이끌기 위해서라도 제국 측 상황을 최대한 파악해 두고 싶다고 했다. 참가자 중에는 로쿠스 아모에누스-코르보라고도 불리는 땅의 총독이 있어 그 일대에 관한 정보는 특히 더 필요하다며. 그래서 히엔 측에서는 종말 소동 때 현지에서 맞서 싸웠던 산크레드에게 연락했다. 그 혼란 속에서 정확히 사태를 파악할 수 있던 자가 있다면 ‘새벽’의 일원들 말고는 달리 없을 터. 그러자 그는 당시 같은 임무를 맡고 있던 라하의 고향이 코르보이니 더 적임자일 것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틀린 소리는 아닌데…… 어릴 때 샬레이안에 온 후로는 크게 교류가 없어. 기대에 부응할 만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그래도 상관없네. 제국 식민지에서 나고 자란 자 중에는 마찬가지로 고향과 소원해진 자가 적지 않네. 그대의 언어로, 코르보에 대해서 들려주게.” 그렇게 부탁을 받으면 거절할 도리도 없다. 라하는 우선 그 땅이 현재 상황에 이르게 된 경위를 간추려서 설명하기로 했다. 처음 그곳이 누구의 땅이었는지를 묻는다면 코르보인도 갈레안인도 모두 ‘우리 땅이었다’고 대답하리라. 알라그 역사를 배운 자로서 의견을 낸다면 오천 년 전에 알라그 제국의 지방 도시가 세워진 곳이며, 노동력으로 동원된 수많은 미코테족이 살았던 곳임은 틀림없지만, 여러 번의 재해와 항쟁 끝에 결국 두 민족이 대치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코르보인이 승리를 거둔 것이 지금으로부터 약 800년 전의 일. 이후 갈레안인은 얼어붙은 북쪽 땅에서 절치부심하게 된다 그 상황이 근대에 이르러 뒤집혔다. 60여 년 전, 군단장 솔 갈부스가 군사에 마도 기술을 도입해 선조의 설욕을 하겠다는 듯 남쪽으로 진군한 것이다. 그들은 비약적으로 상승한 전력으로 코르보인을 제압했다. 지도상에서 그 이름을 지운 후, 로쿠스 아모에누스라고 고쳤다. 식민지로 삼으면서 그 이름을 남기지 않은 유일한 사례인 것을 보더라도 이 승리가 갈레안인에게 특별한 것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름마저 지워진 지 50년 이상이라……” 조용히 듣고 있던 히엔이 불쑥 중얼거렸다. 그로서는 본인의 나라가 그와 같은 길을 걸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일단 문화나 거리의 모습에는 아직 코르보의 흔적이 있어. 그렇지만 정치나 노동의 핵심을 맡고 있는 건 이미 제국 통치하에 태어난 세대야.” 그의 말이 의미하는 바는 종말이 도래했을 때의 대응에도 확연하게 드러났다. 유례없는 재앙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같은 시기에 종말을 맞은 라자한에 비해 행정의 움직임이 둔했다. 물어 따지니 수도 갈레말드의 괴멸로 인해 ‘본국’–갈레안인도 아닌 청년이 분명 그렇게 말했다–과 연계가 되지 않아 일부 기능이 마비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겪은 대로 보고하니 히엔은 눈을 감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지난 해방전쟁이 결판 지어졌을 때, 도마는 제국 식민지가 된 지 25년, 알라미고는 20년이었네. 만약 여기서 십여 년이라도 더 걸렸다면 전쟁의 결말은 달라졌을지도 모르네.” “아무래도 제국 통치하에 있는 상태가 일상이 되었을 테니까……. 그 상태로 별 문제가 없다면 독립을 위해서 싸우려는 의지를 유지하는 건 어렵겠지.” “그래, 누가 코르보의 상황을 탓할 수 있겠나. 정말이지 시간의 힘은 두려운 법이네. 이렇게 말하는 나도 제국식 교육을 받고 자란 몸…… 부모님과 고우세츠라는 존재가 있어 의지가 약해질 일은 없었지만, 제국의 개입이 없던 시절의 ‘순수한 도마인’은 아닌 셈이지.” 그 말에 히엔의 – 제국 통치하에 태어난 세대의 고뇌가 배어 있었다. 갈레말 제국의 엄격한 계급 제도에서 그들 대부분은 시민권을 갖고 있지 않다. ‘도마인이기에’ ‘알라미고인이기에’ 차별을 당하고, 가령 공적을 세워 시민권을 얻는다 해도 모멸이 따라다닌다. 그들은 어느 때던 슬픔과 분노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부모와 조부모가 그리는 조국의 정경에 동참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이 향수를 담아 회상하는 삶은 한 번도 체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곳에 존재했다는 풍습도 긍지도 시대의 벽에 가로막혀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깊은 이국의 향 속에 안타까운 침묵이 감돈다. 그것을 무신경하게 넘겨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라하는 신중히 단어를 골라 조용히, 진지하게 생각하는 바를 말했다. “나 같은 역사학자나 고고학자는 시대를 구분할 때 선을 그어. 여기까지는 그 문명, 여기부터는 이 문명, 이런 식으로.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어진 선에 맞춰 모든 사람을 분류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왕이 바뀌고, 나라 이름이 달라져도 그곳에 여전히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이 있어. 그들이 새로운 바람을 맞아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 가는 거야.” 그렇게 역사는 이어진다. 제국식 교육을 받았든 받지 않았든, 하나의 같은 흐름 속이다. 그것은 변화일 뿐 단절은 아니라고, 의지할 데 없이 살아온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전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히엔은 살짝 놀라며 라하를 마주 보다가 곧이어 뭐가 재미있는지 몸을 구부리고는 큭큭 참았던 웃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아, 미안하네. 그 정도로 기죽어 있지는 않네만……. 뜻밖에도 좋은 말을 들었군.” “뭐!? 아, 저기, 내가 주제넘은 말을 했다면 잊어줘……” “잊을 리가 있나! 머리부터 발끝까지 붉은색으로 빛나는 참으로 현란한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새벽’에 들어갈 만한 걸출한 인물이 맞군. 순간 어느 노스승에게 조언을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네……!” 어지간히 재미있었는지 히엔의 웃음소리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쩔쩔매던 라하가 귀와 어깨를 축 늘어뜨리자 그제야 ‘미안, 미안’이라며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든다. 쾌청한, 저 멀리 아득히 펼쳐진 푸른 하늘을 닮은 미소가 그곳에 있었다. “그대 말이 맞네. 선대부터 바뀌어 온 것, 그리고 앞으로 바뀌게 될 것을 두려워하지 않겠네. 그것까지 다 통틀어 도마라는 나라가 되는 것이니 말일세!” 눈부실 정도로 빛나는 그의 눈은 마치 라하 너머로 먼 미래를 보고 있는 듯했다. 그런 눈빛을 지닌 사람을 과거에도 만난 적이 있다. 모두 끝도 없이 험난한 길을 정복하려는 도전자들이었고, 결국 나아가 별을 따낸 자들이었다. 라하의 입가는 저절로 풀어졌다. 히엔과 도마의 백성이 만들어 나갈 앞으로의 시대가 너무나도 기대되었다. “……호언장담했으니 다음 회담도 좋은 변화의 발판으로 삼아야겠군! 어디 보자, 이번에는 코르보의 명물 이야기라도 들려주겠나? 음식 이야기는 나라를 불문하고 특히 더 재미있는 법이지.” 말하면서 히엔이 일어선다. 그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이번에는 그가 씨익 웃는다. “그런 이야기는 여기 틀어박혀 있지 않아도 되지 않겠나. 멀리서 찾아준 손님을 대접도 하지 않고 음식 이야기를 하라고 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이것저것 이야기를 많이 들려줬으니, 보답으로 도마의 음식을 마음껏 즐기고 가게!” 흔쾌히 승낙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함께 건물 밖으로 나간다. 과거 국정의 중심지였던 도마성은 강 건너편에서 여전히 반쯤 무너진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만, 도마 도읍지는 부흥의 열기와 북적대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것 또한 변화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피바람을 넘어, 사람들은 오늘도 이 땅에 살고 있다. 힘차게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