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월의 종언 못다 한 이야기

패치 V6.0 효월의 종언 메인 스토리의 내용 중 일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직 메인 스토리를 완료하지 못한 분께서는 주의 부탁 드립니다.

「그림자의 기록」

얼어붙은 대지 위로 하얗게, 그저 하얗게 눈이 쌓이고 있다. 중앙 산맥의 북쪽, 즉 갈레말 제국의 근거지는 종말 소동이 지나간 지금도 불안한 듯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붕괴한 수도 갈레말드에서 서쪽으로 약 400말름, 제국 도시 중에서는 중간 규모인 그 도시에서도 행인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굳어 있다. 드문드문 들려오는 길모퉁이의 잡담들마저 어둡게 가라앉아 활기가 느껴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산크레드는 제국병에게 지급되는 표준 코트와 귀마개가 달린 모자를 쓰고 큰길을 걷고 있다. 다른 사람들처럼 인상을 쓰고 마치 직무 중인 것처럼 주위를 살피며 걷는다면 순찰 중인 일개 병사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 재빠르게 뒤쪽으로 주의를 돌리면서 산크레드는 뒷골목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인기척이 없는 좁고 음침한 길을, 도시 밖을 향해 걷는다. 얼마 뒤 돌로 포장된 바닥이 끝나고 하얀 설원이 펼쳐졌다. 거침없이 걸어 들어가길 두 걸음, 세 걸음…… 등 뒤로 심상치 않은 기색이 느껴지더니, 구두 밑창이 자갈을 문지르는 소리와 가죽이 펄럭이는 소리가 거의 순식간에 달려들었다. 뒤돌자마자 뽑아 든 검으로 덮쳐오는 묵직한 참격을 받아넘긴 후 그대로 상대의 품으로 파고들어 팔꿈치로 날카롭게 턱을 쳤다. 습격자는 신음도 내지 못하고 기울어지더니 떨어뜨린 전투낫과 함께 눈으로 쓰러진다. “미안하지만 모른 척해줘. 이번에는 그저 상황만 보러 온 것뿐이니까.” ‘새벽의 혈맹’이 표면적으로 해산하고 나서도 산크레드는 세계를 줄곧 지키고 있다. 여동생처럼 소중했던 동료가 목숨을 걸면서까지 지키고 사랑했던 것을 미래로 이어가려는 발악 같은 것이다. 최근에는 큰 사건이라 부를 만한 소동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앞날이 불투명한 갈레말드 제국의 주변에는 어쩐지 수상쩍은 안건이 빈번히 발생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도시를 정찰하러 온 것인데 – 산크레드는 다시 눈 위의 습격자에게 시선을 돌린다. 온몸을 검은 옷으로 감싸고 유일하게 드러낸 눈가에는 그가 노년임을 보여주듯, 깊은 주름이 파여 있다. 마도 혁명 이전의 갈레말드 제국에서 이민족을 처단하는 역할을 맡았다던 암살자 ‘리퍼’, 그 생존자가 산크레드의 존재를 눈치채고 우국지사로서 처단하러 온 것일까. 앞으로의 대처를 검토하면서도 생각은 그만 과거로 흘러가 버린다. 노병과 전투낫…… 그것이 가리키는 또 다른 인물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살았던 곳은 마침 이 설원의 하늘과 땅을 뒤집어 놓은 듯 흰빛 가득한 세계. 그곳에서 싸우다 끝내 목숨을 잃었다. 란지트 장군, 그 사람이다. 그 장군의 신상에 대해서는 ‘민필리아’를 율모어 감옥동에서 구출할 때 공들여 조사한 바 있다. 빛의 범람이 일어나기 전, 세계를 누비며 활동하던 암살자 집단이 있었다고 한다. 의뢰를 쉽게 받지는 않지만, 한 번 맡은 일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다는 실력자들. 그 상세한 내용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렵게 찾아낸 몇 안 되는 기록에는 대단히 놀라운 내용이 담겨 있었다. 가로되, 그들은 혈연 또는 그에 필적하는 계약으로 맺어진 집단이다. 가로되, 그들은 출신을 모호하게 하기 위해 일부러 다른 종족 사이에 아이를 낳아 암살자로 키운다. 가로되, 그들은 피를 촉매로 쓰는 요술을 사용한다…… 산 채로 불태워지고 사지가 찢기는 수련을 견딘 자만이 그것을 터득한다고. 그들이 어떤 사상을 가지고 암살술 통달에 생애를 바쳤는지, 지금에 와서는 알 도리도 없다. 그저 집념이라고 부를 만한 어두운 열의를 짧은 기록에서 엿볼 수 있었다. 제1세계에서 약 100년 전, 암살자 집단의 두목이었던 잘바드는 율모어 시장의 집무실을 방문했다. 용건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방문 중에 빛의 범람이 발생했다는 사실이다. 그 지역에 어쩔 수 없이 머무르게 된 잘바드와 몇몇 부하들에게 시장은 의식주를 보장했다. 그에 대한 답례였는지, 아니면 세계 멸망의 위기를 앞두고는 어쩔 수 없었는지 그들은 경비와 호위 정도의 경험밖에 없었던 병사들에게 실전 전투 기술을 가르쳤다. 이리하여 무의 대지에서 죄식자가 대거 몰려왔을 때도 잘바드가 이끄는 율모어의 군대는 대항할 수 있었던 것이다. 빛의 범람으로부터 12년, 잘바드에게 아들이 태어난다. 친모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점을 보건대, 자신의 기술을 물려주고 싶다는 잘바드측의 의지에 따른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 태어난 아이는 말문이 제대로 트이기도 전에 혹독한 훈련부터 받았다고 한다. 여기서 드디어 그 이름이 역사에 등장하는 것이다. 잘바드의 아들, 란지트. 그 당시, 살아남은 인류는 끝이 보이지 않는 죄식자와의 싸움으로 인해 피폐해져 있었다. 얼마 뒤 대륙 쪽에서는 푀부트 왕국이 무너지는데, 멸망의 문턱에서 예기치 못한 전환기가 찾아온다. 죄식자화에 대한 내성을 가진 소녀가 발견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2년 후 율모어의 보호를 받게 된 그녀는, 그 특징 때문에 빛의 범람을 막았다는 전설적인 존재 ‘민필리아’라는 이름을 부여받았다. 죄식자화에 대한 내성을 살리기 위해서는 전선에 나설 수밖에 없다. 잘바드는 보호되었을 당시 아직 12살이었던 그녀를 병사들과 동등하게 만들고자 했다. 한편으로 란지트는 5살이나 그쯤이었을까? 인류의 새로운 희망으로 발견된 자와, 암살술의 계승자로 태어난 자. 기대되는 결과는 달라도 같은 스승을 따르는 아이들이라 불렸던 시대가 있었던 것이다. 거기서 어떤 말이 오가고 서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시시각각 지나가는 어린 날을 어떤 얼굴로 살아냈는지. 기록에는 없고 다른 사람은 더 이상 알 길이 없다. 다만 당시의 민필리아에 대한 보고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명랑한 성격으로 즐겁게 주위와 교류하는 모습은 평생을 율모어에서 살았던 사람 같다. 자신의 특이한 능력에 자만하지 않고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 사명이라며 매일 훈련에 힘쓰고 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그녀는 아마도 가혹한 수련에 몰두하는 어린 선배를 못 본 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어른들의 의도는 결실을 맺어 수년의 시간을 거쳐 민필리아의 존재는 세상에 대대적으로 공표되었다. 동시에 그녀를 기치로 내세운 대 죄식자 특수 부대 ‘정죄병단’의 결성도 선언되었다. 부대를 실질적으로 지휘한 것은 다름 아닌 잘바드였다. 그들은 그야말로 결사의 각오로 인류의 반전 공세를 펼쳤다. 토벌에 나서면 그때마다 적지 않은 희생자를 냈지만, 지금껏 언제 끝날지 모르는 방어전을 계속하던 사람들은 그들의 승리에 열광했다. 어떤 날은 귀환하는 정죄병단을 맞이하기 위해 율모어의 테라스에 모인 민중이 서로 밀치다 바다로 떨어지는 소동까지 일어났다고 한다. 민필리아는 늘 그들에게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그 옆에는 잘바드와, 그의 아들이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고 한다. 그 뒤로 몇 번의 승리가 있었고 셀 수 없는 상실이 있었다. 계속해서 전진한 정죄병단은 인류에게 죄식자에 관한 몇 가지 사실을 가져왔다. 그리고 마침내 대망의 때가 온다. 드베르가르 산맥의 오지에서 콜루시아 섬 일대를 지배하는 대죄식자를 궁지에 몰아넣은 것이다. 격투 끝에 최후의 일격을 날린 것은 잘바드였다. 곧이어 환호성이 터져……야 했지만, 그곳에서 기다리던 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이었다. 대죄식자가 갖고 있던 강한 빛의 힘이 방출되어 잘바드를 집어삼킨 것이다. 그는 여태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괴성을 지르며 순식간에 괴물로 변해 갔다. 대죄식자를 쓰러뜨린 자가 다음 대죄식자가 된다는 사실을, 인류가 처음 목격한 순간이었다. 어쩔 수 없이 후퇴한 정죄병단은 대죄식자를 토벌했지만 그 과정에서 잘바드가 전사했다고 전했다. 적어도 새롭게 대죄식자가 된 잘바드가 공격해오지 않는 한, 속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도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위대한 전사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역사적인 승리를 크게 기뻐하며 축하했다. 그 뒤에서는 민필리아가 각지를 다스리는 조직의 대표자들에게 비밀리에 대죄식자화에 관한 진실을 공유했다. 모두 하나같이 탄식하며 어려운 미래를 예상했을 것이다. 무언가 대책은 없을지 고민하고 – 적어도 민필리아 자신은 깨달은 것이다. 죄식자화에 내성이 있는 자신이 대죄식자를 쓰러뜨리면 비극의 연쇄는 끊길지도 모른다는 것을. 정죄병단은 죄식자 토벌을 계속했다. 잘바드의 역할은 아직 10대였던 란지트가 물려받았다. 그 암살술이 그에게 얼마나 계승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적어도 죄식자와의 전적이라는 면에 있어서는 선대의 시절과 손색없는 성과를 올리고 있다. 스승이자 아버지인 인물을 잃은 직후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너무나 우수할 정도였다. 한편으로 이 당시의 군사 기록에서는 그가 아니라 민필리아가 대부분의 작전을 추진하고 있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내가 대죄식자를 쓰러뜨리겠다고, 그러기 위한 힘을 얻고 싶다고, 서면에 실리지 않은 외침이 들리는 듯했다. 작전이 시작되고 민필리아가 적을 도륙한다. 란지트도 도륙한다. 또 새로운 작전이 시작되어 민필리아가 도륙한다. 란지트가 도륙한다. 그 축적만이 그들의 대화인 듯했다. 그렇게 병단이 결성된 지 10여 년.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 달려온 민필리아가 그 무릎을 땅에 꿇었다. 죄식자화에 내성이 있다곤 하나, 살이 찢기면 피를 흘리고, 피를 흘리면 죽음에 이른다. 그녀는 동료들을 불러 모아 민필리아의 재림을 예언했다. 그녀 안에 있는 ‘진정한 빛의 무녀’가 그렇게 고하고 있노라고, 고통으로 거칠게 호흡이 흐트러지면서도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그렇게 역할을 다한 당대의 민필리아는 마지막으로 란지트와 둘만 있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어떤 기록도 전해지지 않았던 것이다. 같은 스승 아래, 한쪽은 빛, 한쪽은 그림자가 되었던 두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도, 마지막 순간 민필리아가 원통함에 눈물을 흘렸는지 아니면 안도의 미소를 띠었는지도, 남겨진 란지트의 생각조차도 무엇 하나……. 그녀의 죽음을 둘러싼 정보로 남아 있는 기록은 성대한 장례식이 열려 국가를 불문하고 수많은 사람이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다는 것, 그리고 시신은 란지트의 손에 의해 율모어의 지하 묘지에 매장되었다는 것이었다. 민필리아의 환생은 전 세계를 수색한 끝에 3년이 채 지나지 않아 발견되었다. 율모어로 끌려온 소녀는 확실히 똑같은 금빛 머리칼과 에테르의 빛을 머금은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검증 결과, 죄식자화에 대한 내성도 확인되었다. 하지만 그뿐. 그녀는 선대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고, 인사도 겨우 할 수 있을 정도로 수줍음 많은 여자아이였다. 그럼에도 다시 세상에 드러난 이상, 희망의 상징이 되어주어야 한다. 란지트는 과거 자신과 민필리아가 잘바드에게 훈련받았듯이, 어린 소녀에게 싸우는 기술을 가르쳤다. 그 민필리아는 12살까지 살았다. 전장에 나간 횟수는 10번도 채 되지 않는다. 이와 더불어 죄식자 연구가 함께 진행되었고, 힘없는 소녀도 그들의 숨통을 끊을 방법이 모색되어 왔던 모양이다. 결과적으로 알게 된 사실은, 죄식자는 아무리 그럴듯한 형태를 띠고 있어도 생물은 아니라는 것. 몸을 갈라보아도 내장이 의미 있는 형태로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점토로 만들어진 인형처럼 어딘가를 베어 숨통을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강인한 힘으로 파괴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란지트는 민필리아들을 계속 훈련시켰다. 소질이 있는 자도 있었지만, 반대로 전혀 소질이 없어서 “나를 죽이고 다음 아이를 키워요”라며 울면서 애원하는 자도 있었다. 그래도 계속해야만 한다. 소녀들의 인생을 소모해 나간다. 오로지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 이 굴레에 마침표를 찍은 건 누구였을까. 빛의 범람 이후 실로 80여 년이 흘렀고 율모어에 새로운 원수 바우스리가 군림하게 되었다. 그가 가진 능력으로 죄식자는 쓰러뜨리는 존재에서 복종시키는 존재로 변했고, 정죄병단은 해체되었다. 뿐만 아니라 민필리아에게 살해당하는 꿈을 꾸었다는 그는 당대의 그녀를 때려죽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란지트에게 다음 환생한 자를 찾아내어 발견하는 대로 유폐하고 반역자가 될 힘을 주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여기서도 역시 란지트의 심경을 기록으로 알 수는 없다. 다만 훗날 민필리아와 함께했던 ‘어둠의 전사’ 일행이 그에게 들은 말을 새롭게 덧붙일 수는 있으리라. “전장은 지옥이요, 투쟁은 쓸모없는 것이니, 아무 탈 없을 때 얻는 평화가 유일한 행복이니라.”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는 한…… 그리고 정의를 추구하려 하면 할수록 전쟁은 피할 수 없다. 그렇기에 정의롭지도 않고, 평범한 인간도 아닌…… 그런 자가 제시한 평화에 모든 것을 걸기로 한 것이다.” 란지트, 향년 88세. 그의 유해는 민필리아들의 묘지 앞에서 발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