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월의 종언 못다 한 이야기

패치 V6.0 효월의 종언 메인 스토리의 내용 중 일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직 메인 스토리를 완료하지 못한 분께서는 주의 부탁 드립니다.

「어느 친구들의 기록」

인간 삶의 중심을 담당하는 수도 아모로트. 그 광대한 도시의 일각에 애니드라스 아남네시스라고 불리는 시설이 있다. 인간이 창조한 모든 종의 기록, 즉 이데아를 보관하는 장소이자 인간이 발견한 만물의 이치를 모아두는 곳. 말하자면 인간의 모든 지혜를 담아두고 있는 거대한 상자 같은 곳이다. 그토록 방대한 기록이 있으니 정리 정돈에도 적지 않은 인력이 필요하다. 계속해서 늘어나는 기록――대부분 서적이나 크리스탈에 기록되어 있다――을 분류하고 재정렬하는 것은 직원들의 업무이기에, 그들은 확실한 지식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애니드라스의 직원이 된다는 것은 특히 학자처럼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각별한 명예로 여겨졌다. 남자는 그런 직원 중 한 명이었다. 다른 사람은 새로운 존재를 창조하는 일에 열정을 쏟았지만, 그는 ‘이미 존재하는 것’을 추적하고 관찰하는 일에 관심을 가졌다. 돌이 돌로서 존재하게 만드는 요소를 분석하고 그 바탕에 깔린 보이지 않는 법칙을 도출한다. 사물의 가장 작은 요소를 알아내어 그 집합체인 별, 그리고 세계 자체를 규명하고자 하는 학문이었다. 그는 애니드라스 직원으로서 선임이 기록한 자료를 꼼꼼하게 정렬하고, 시간이 빌 때면 그 자료들을 참고하면서 자신의 학설을 연구했다. 나무의 나이테 혹은 대지에 생기는 지층처럼 묵묵히 지식을 쌓아나가는 것이 좋았다. 어느 날, 남자는 애니드라스 소장의 부름을 받았다. 만나 봤으면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이어서 나온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었다. 최근 수백 년 동안 생명에 관련된 깊은 연구 결과를 다수 발표한, 날카로운 분석력을 가진 학자. 생명체를 어디까지나 물질의 일종으로 보는 사고방식은 남자가 연구하는 분야와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 학자가 애니드라스에서 자료를 찾기 위해 조수를 구하고 있다고 한다. 남자는 반쯤은 흥미로 반쯤은 거절할 이유가 없어서 그를 만나보기로 했다. 약속한 시각이 되어 입구 근처에 마련된 응접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묵직한 문을 두드리자 의외로 시원스러운 여성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가로막힌 문을 여니 목소리의 주인인 그 학자가 홀로 서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감싸고 있는 검은 로브, 눈가를 가리고 있는 흰 가면은 남자를 비롯해 대다수 시민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하지만 남자가 들어오자마자 그녀는 후드를 내리고 가면을 벗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베네스라고 해요.” 가면을 벗는 행위는 꼭 벗어야만 하는 특별한 장소를 제외하고, 친구처럼 친한 사이에서만 허용된다. 또는 중대한 결정을 내리거나 스승에게 가르침을 청할 때처럼, 진지한 상황에서 예의를 갖춘다는 의미가 있다. 그녀가 어떤 의미로 얼굴을 드러냈든 남자를 사역마처럼 다룰 생각은 없다는 의지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예기치 못한 사태에 당황한 남자는 깊이 숨을 내쉰 뒤 그녀의 올곧은 자세에 경의를 표하며 자신의 가면에 손을 댔다. 서로의 목숨이 다할 때까지 계속된 두 사람의 기묘한 친구 관계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베네스는 명랑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 특히 머리가 비상하여 그녀가 펼치는 변론은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남자는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동그란 구슬 모양의 보석을 떠올렸다. 어느 쪽에서 바라봐도 일그러짐 없는 완전한 구체. 무던하게 어떤 각도에서든 빛을 희미하게 반사하고 있는 듯한…… 그런 느낌. 인상이 바뀐 것은 자료 수집을 도운 지 몇 년이 지난 뒤였다. 애니드라스의 한구석에서 계속해서 글을 쓰고 있던 그녀가 펜을 내려놓았다. 이를 눈치챈 남자는 들고 있던 책을 선반에 돌려놓고, 그녀가 기록하고 있던 내용을 뒤에서 어깨너머로 들여다보았다. 그녀가 오랜 세월 동안 연구했던 가설이 종이 위에서 모순 하나 없는 한 개의 고리로 이어져 있었다. 진실이 된 것이다. 그 사실을 이해하자마자 남자의 가슴에도 안도감과 기쁨이 복받쳐 올랐다. “오, 축하해.” 하지만 베네스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이상하다 싶어 이번에는 옆에서 들여다보니 그녀는 자신이 쓴 글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대로 몇 초간 미동조차 하지 않다가 서서히 가느다란 양손을 입가로 가져갔다. ―― 웃고 있다. 그것도 손가락으로 가려지지 않을 만큼 활짝. 평상시 늘 짓던 잔잔한 미소가 아니라 용솟음치는 환희가 흘러넘치는 듯한 웃음이었다. 밝은 바닷빛 눈동자까지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어느새 가면을 벗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을 남자가 잊어버린 것일까, 그것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확연한 빛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대단해…….” 멍하니 베네스가 말했다. “우리가 살아 있는 건 그야말로 기적이야.” “이상한 소릴 하네. 그게 바로 일정 법칙에 기반한 필연의 결과라는 걸 네가 이렇게 증명한 거 아냐?” “그 필연이 필연이라는 사실이 대단한 거야…… 이렇게나……” 그녀의 눈은 종이 위에 펼쳐진 진리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쩌억, 남자의 뇌리에서 구슬이 깨졌다. 새롭게 생겨난 단면이 날카롭고 강력하게 빛을 반사해 그녀라는 보석에 유난히 눈부신 빛을 비추고 있었다. 그래, 이것이 바로 그녀가 존재해야 하는 형태였다. 비록 근거를 댈 수는 없어도 틀림없이 그럴 거라고, 남자는 빛 앞에서 생각했다.

베네스는 세계의 형태를 밝혀낼 수 있을 정도로 무언가를 느끼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어느 날, 애니드라스로 뛰어 들어오더니 남자에게 말했다. “나, 여행을 떠날 거야.” 어디로 갈 거냐고 물으니 목적지는 없다고 한다. 세계를 알기 위한 여행.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을 듣고, 느끼고, 생각하기 위한 여행이라고 그녀는 대답했다. “알았어. 부디 몸조심해.” 그렇게 말하자 베네스는 또다시 환희에 가득 찬 미소를 짓고는 로브의 끝자락을 가볍게 휘날리며 거대한 상자에서 떠나갔다. 남자는 입구의 문이 완전히 닫힐 때까지 그녀를 배웅하고 이내 원래 일하던 의자로 돌아와 앉았다. 운반된 자료를 훑어보고 잠시 생각한 뒤 제자리를 찾아서 넣는 일을…… 묵묵히 반복한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녀가 다음에 이곳에 온다면 어떤 자료를 찾을지 상상하게 되었다. 자신의 학설을 연구하기 위한 시간이 점차 전문이 아닌 분야를 알아가는 시간으로 바뀌었다. 새로운 배움은 신기할 정도로 재미있었다. 때로는 단 몇 달 만에, 때로는 십여 년이 지난 후에 베네스는 애니드라스에 얼굴을 비추었다. 여행길에서 만난 가슴 설레는 일들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상자 속 지식을 찾으러 오는 것이다. 자신의 경험을 생생하게 이야기하는 그녀에게 처음 만났을 무렵 어딘가 희미하게 느껴지던 인상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비유하자면 복잡한 면을 가진 크리스탈처럼 그때그때의 환희를 비추며 빛나고 있었다. 남자는 그녀의 이야기에――또는 이야기 속 그녀의 대담한 행동에――몇 번이나 놀라면서도, 의문을 제기하는 그녀에게 곧바로 관련 자료를 내밀어 그녀를 놀라게도 했다. 달라진 점은 또 하나 있었다. 베네스가 14인 위원회의 아젬 자리에 취임한 것이다. 세계를 둘러보는 관찰자 역할은 지금의 그녀에게 딱 맞는 자리라고, 남자는 생각했다. 그리고 사람을 이끄는 위치가 되었으니 그에 맞는 예의를 갖춰서 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시 찾아온 그녀에게 남자는 여느 때보다도 한층 더 정중한 태도로 자료를 추천했다. 그러자 그녀는 눈썹을 찌푸리며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신까지 날 그렇게 대하면 너무 불편한데요.” “지금 수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고 계신 분인데, 저만 편하게 부를 수 없지요. 받아들이십시오. 금방 익숙해질 겁니다.” 처음에 그런 갈등이 있긴 했지만, 그녀는 아젬의 업무를 더할 나위 없이 사랑했으며 큰 활약을 펼쳤다. 포악한 짐승이 인간의 마을을 습격했다는 소식에 짐승의 근거지인 숲에 들어가 원인을 규명했고, 조사하러 가서 돌아오지 않는 지인을 걱정하는 자를 위해 험난한 산을 넘어 찾아다녔다. 아이들이 순수한 마음에 만들어낸 탑만큼이나 거대한 창조 생물을 쓰러뜨리는가 하면 농작물에 섞인 유독성 식물을 선별하는 일도 그녀 몫이었다. 대규모 대책이 필요한 건은 14인 위원회에 들고 왔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일들에 직접 나섰다. 황금 털을 휘날리는 사역마에 올라타고 쉬지 않고 땅과 바다, 하늘을 뛰어다니며……. 그러더니 농담인가 싶어질 정도로 맥없이 그 자리를 후임자에게 물려주기로 했다고 하는 것이다. 여행지에서 재미있는 아이를 만났다고 말하는 그녀는 마치 보물을 찾은 것처럼 기뻐 보였다. “그렇지만 당신이 아젬의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이 아직 있지 않을까요?” “저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아도 세계를 돌아다닐 수 있어요. 그보다도 그 아이에게 좀 더 멀리 내디딜 계기를 만들어주고 싶어요. 여행은 여행자의 수만큼 있지요……가령 같은 장소에 서 있어도 그 아이는 나와 다른 것을 보고 들으며 느끼고 생각할 거예요. 새로운 발견이 분명 많이 있을 거예요.” 대답을 들으니 자리를 내려놓은 뒤 별로 돌아갈 것 같지는 않아서 남자는 은근히 기대했다. 이미 이 무렵에는 애니드라스에서 일하던 동료 중 상당수가 최종 목표라 할 만한 진실을 도출해 칭찬을 받으며 별로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폭넓은 지식을 추구하게 된 남자는 그들과 같은 길을 바랄 수 없었다. 자신의 목숨을 내려놓아도 될 정도로 이루어야 할 소망이 있다면, 눈앞에 있는 이 걸출한 인물이 어디로 가는지…… 그 발걸음이 닿는 곳을 지켜보고 싶다는 것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베네스는 아젬의 자리를 물려주고 소속이 없는 조언자에게 주어지는 흰옷을 걸쳤다. 한편 남자는 애니드라스의 소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리하여 다가오는 종말의 시기에 애니드라스 아남네시스는 베네스 파의 거점이 되었다.

재앙이 별을 불태우고 조디아크가 그것을 물리쳤다. 그 신 아래 모인 사람들은 앞으로 새로운 제물을 바치고 별에 생명의 씨앗을 뿌릴 것이라 한다. 후에 이를 거둬들여 제물이 된 자들 대신에 바칠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은 아무 일 없을 것이고, 사람들은 낙원으로 회귀할 것이다. 남자와 베네스, 그리고 그 동료들은 그들의 계획에 이의를 제기했다. 미래가 과거를 위해 쓰여서는 안 된다. 상처도 상실도 받아들이고, 그럼에도 앞을 바라보는 것이 진보다. 따라서 조디아크는 사람들의 손이 닿는 곳에 존재해선 안 되었다. 그 신을 밀어내기 위해 선택된 수단은 베네스 파에 속한 자들의 목숨으로 ‘족쇄’가 될 존재를 창조하는 일이었다. 규모부터 월등한 조디아크에 육박해야 하기에, 이쪽은 제물을 영혼조차 남기지 않고 다 써버려야 했다. 모든 것이 결정된 날 밤, 남자는 애니드라스에 머무르고 있던 베네스에게 말을 걸었다. “베네스 님……하이델린 소환은 역시 당신이……?” 족쇄, 즉 하이델린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제물 외에도 핵이 될 인물이 필요하다. 그녀가 적임자라는 건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각에선 그녀만 남아 있으면 실패해도 다음을 기약할 수 있다는 의견도 있었기에, 남자는 그녀가 마지막까지 인간으로 존재했으면 하는 마음도 갖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핵이 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어떤 식으로 존재할지는 늘 그렇듯 내 의지에 달렸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막지 않겠습니다. 단지…… 제 개인적으로…… 작별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남자가 솔직하게 고하자 베네스는 곤란한 것 같기도 하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기도 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고는 잠시 말이 없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건 제가 할 말이에요.” 무엇이 아쉽다는 것일까, 잠시 생각한 뒤에 겨우 깨닫는다. 남자는 제물이 되어 사라지기로 되어 있었다. 적절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아 늘 그랬듯이 품속에서 크리스탈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그것에는 그녀가 추구하던 별 바깥에 관한 지식, 그 마지막 한 편이 담겨 있다. 그것이 왜 필요한지는 들었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을 것이다. 특히 미래에 대해서 그녀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우리의 미래가 배운 것과 반드시 같을 것이라는 법은 없어요. 섣불리 미래를 단정 짓지 말고 최선을 선택해야죠”. 둥근 구슬 같던 그녀는, 강한 결의를 담아 그렇게 말했다. “……너의 변화는 눈부셨어. 나의 변화도 흥미로웠지. 이 사실을 근거로 가설을 세우지. 사람이 계속해서 변해 간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좋았다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이 올 거야. 힘을 보탤 테니 네가 그걸 증명해 줘.” 대답은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길고 긴 정적 후에 베네스는 한숨을 쉬듯 작게 웃으며 그에게서 크리스탈을 받았다. “그건 그렇고”, 남자는 얼굴에 미소를 띠고 말을 이었다. “너의 당당한 모습을 마지막까지 지켜보지 못하는 게 아쉽군. 할 수만 있다면 나를 하이델린의 눈으로 만들어줘. 결코 감지 않고 네가 가는 곳을 끝까지 지켜볼 테니.” 거짓말은 아니지만, 이루어질 거라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남자는 사라질 것이고 이별은 이별이다. 하지만 말은 남길 수 있다. 추억으로 삼든 농담으로 넘기든, 이 말과 함께 긴 여정을 걸어가기를. 그리고 그 여행의 종점에서 너 또한 ‘좋았다’고 말하길 바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