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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널판타지14 못다 한 이야기

효월의 종언을 기다리며, 등장인물들의 미처 말하지 못했던 특별한 이야기들을 공개합니다!

「빈 옥좌」

이슈가르드 교황청, 알현의 방. 그 가장 안쪽에 자리한 교황의 옥좌에 앉을 사람은 이제 없다. 한 모험가가 천 년에 걸친 용시전쟁을 종결로 이끈 후, 이슈가르드의 정치 체제는 교황이 주도하던 신권 정치에서 귀족원과 서민원으로 구성된 공화제로 바뀌었다. 한때 극소수의 사람들만 교황을 알현하던 이 공간은, 공적인 회의가 열리는 의사당으로 바뀌어 지금은 수많은 의원이 드나들고 있다. 포르탕 백작가의 당주가 된 아르투아렐 역시 귀족원의 의원으로서 그 책무를 다하고 있었다. “그럼 지금부터 표결에 부치고, 오늘의 회의를 마치겠다. 투표를 마친 사람부터 퇴실해도 좋다. 모두 늦은 시간까지 고생 많았다.” 해 질 무렵, 장엄한 석조 건물의 실내에 아이메리크 드 보렐 자작의 목소리가 울린다. 귀족원의 의장이 된 그는 각국과의 공무까지 병행하며 하루의 대부분을 의회에서 보내고 있었다. 그가 말을 마치자 의원들은 투표를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황이 쥐고 있던 주권이 민중의 손으로 넘어갔다고는 하지만, 대표로 선출된 양 원 의원들은 아직은 낯선 공화정을 어떻게 운용해야 할지 그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아르투아렐 역시 의원들과 함께 투표를 마친 후, 자리를 정돈하고 귀가하려 하던 바로 그때…… 그의 눈에 빈 옥좌가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옥좌는 비어 있었지……
전 교황이 승하한 17년 전, 새로운 교황 토르당 7세의 취임식이 이 알현의 방에서 열렸다. 취임식은 엄숙하게 진행되었으나, 새 교황의 모습을 보기 위해 몰려든 인파가 둥근방패 대광장까지 가득했다고 한다. 그러나 알현의 방에서 정식 참관이 허락된 사람은 성직자들과 창천기사단, 그리고 교황 선출권을 가진 사대 명가 일족뿐이었다. 당시 13세였던 어린 아르투아렐 역시, 포르탕 가의 장남으로서 함께 참관했다. 집사들이 입혀 준, 평소 만찬회에서 입던 옷보다 훨씬 더 고급스러운 예복은 그의 가슴을 뛰게 했다. 막냇동생 에마넬랭도 교황 취임식이 무슨 의미인지는 몰랐으나, 그 중요함은 이해했는지 어른들을 따라 얌전히 있었다. 하지만 오르슈팡은 그 자리에 없었다. 한집에 살면서도 포르탕이라는 이름을 허락받지 못한 그는 집에 남았다. 출발 전에 아버지가 씁쓸한 표정으로 이야기한 이유를 아르투아렐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오르슈팡을 싫어하는 것, 그리고 그에게 형제답지 않은 서먹한 분위기가 있다는 것을 어려서부터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내막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은 조금 더 나이를 먹은 후였다. 그렇게 한 명이 빠진 포르탕 가와 사대 명가의 사람들 앞에, 교황만이 입을 수 있는 법의를 두른 토르당 7세가 모습을 드러냈다. 초대 교황부터 대대로 내려온 보석홀장 ‘전투신의 자비’를 손에 쥐고 정면을 응시하며 옥좌로 향하는 장엄한 모습에, 어른들은 이 사람을 선택한 것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고, 아이들은 경외심을 품었다. “나, 토르당 7세는 전쟁신 할로네의 지상의 대리자로서 이 자리에서 맹세한다. 담대왕 토르당의 유지를 받들어 올바른 계시를 전하고 올바른 위정을 펼치겠노라. 사룡을 물리친 열두 기사의 핏줄을 이은 귀족 제군을 비롯한 모든 이에게 축복이 함께하기를.” 토르당 7세의 선서에 아르투아렐은 깊은 감명을 받았다. 아버지와 가정 교사에게 배운 내용이기는 했으나, 자신의 조상이 건국 신화에 등장하는 열두 기사라는 사실을 다시금 강렬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긍심을 가슴에 품고 새로이 결의를 다졌다. 나도 선조님처럼 이슈가르드를 지키는 훌륭한 기사가 될 거야……! 신임 교황의 선서가 끝나고 취임식이 막을 내리자, 참석자들은 집으로 돌아가는 무리와 남아서 환담을 나누는 무리로 갈라졌다. 알현의 방의 문이 열리자 새로운 교황을 잠깐이라도 뵐 수 없을까 기회를 엿보는 하급 귀족과 사대 명가에 연줄을 대고 싶어하는 기사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아르투아렐은 에마넬랭과 함께, 사람들과 환담을 나누는 아버지 에드몽의 뒤에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귀족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동향을 늘 주시해야 한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그런 아르투아렐의 시선 끝에 뒤랑데르 가와 제멜 가 일족이 일찌감치 돌아가려는 모습이 들어왔다. 사대 명가 중에서도 빨간 바탕색의 문장을 쓰는 두 가문은 일족들끼리만 몰려다니며 권모술수에 능하다는 인상이 강하다. 한편, 검은 바탕색의 문장을 쓰는 포르탕 가와 아유나르트 가는 사교적이며 오래전부터 깊은 인연을 맺은 관계다. 지금 에드몽이 당주인 보랑두앵을 비롯한 아유나르트 가의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아유나르트 가의 4남 1녀 중 막내인 프란셀은 참석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버지들의 대화 주제가 어려운 이야기로 옮겨가자 아이들도 편하게 떠들기 시작했다. 에마넬랭이 활짝 웃으며 아유나르트 가의 셋째 아들 클로드뱅과 장녀 라니에트에게 달려갔다. 라니에트와 에마넬랭은 늘 동생들을 잘 보살피는 클로드뱅을 잘 따랐다. 아르투아렐은 장남 스테파니비앙과 차남 오르바엘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나이가 비슷한 이 아이들은 장차 아군이면서 경쟁자가 될 존재다.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친분을 다져야 하는 대상이다. “그렇게 격식 차릴 필요 없잖아. 나이도 동갑인데.” 스테파니비앙은 그렇게 말하고 쾌활하게 웃었다. 오르바엘도 해맑게 말했다. “솔직히 난 지쳤어. 취임식도 끝났는데 빨리 집에 가고 싶어……” “나도 만들다 만 기계가 기다리고 있어. 아버님께 말씀드리고 먼저 집에 가자.” 말을 마치기 무섭게 그들은 아르투아렐에게 작별 인사를 하더니, 아버지의 허락을 받곤 집으로 가 버렸다. 천진난만하고 정다운 두 형제가 아르투아렐은 조금 부러웠다. 그렇게 혼자 남겨진 아르투아렐은 다시 사람들의 동향을 나름대로 관찰하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자신보다 조금 나이가 많은 듯한, 늠름한 외모의 검은 머리 소년이 험악한 표정으로 비어 있는 옥좌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모습에 놀란 아르투아렐은 무심코 말을 걸었다. “저기…… 왜 그렇게 화가 났어? 교황 성하가 싫어?” 흠칫하며 돌아본 소년은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귀공은 포르탕 가의……. 저의 태생에 대한 소문을 모르신다면 귀공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퉁명스러운 대답에 아르투아렐은 당황했다. 검은 머리 소년이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그의 이름은 아이메리크 드 보렐. 자작 가문의 양자지만, 성직자로서 독신이어야 마땅한 토르당 7세가 연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라고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년이었다. 보렐 자작과 부인은 아들을 아끼는 마음에 친부모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세상의 호사가와 협잡꾼, 참견꾼들이 소년의 귀에 들어가도록 일부러 소문을 퍼뜨리고 다녔기에 아이메리크는 조금씩 자신의 태생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언젠가 교황을 알현하여 진상을 확인하겠다고 마음먹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일개 자작 가문의 소년이 고위 성직자, 그것도 신임 교황을 알현할 기회가 쉽게 올 리 없었다. 그렇다고 어린 소년에게 화풀이할 수는 없는 노릇. 반사적으로 대꾸하기는 했으나 아이메리크는 겸연쩍은 마음에 다시 아르투아렐에게 말을 걸었다. “그…… 토르당 7세 성하께서는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음, 모든 이에게 축복이 있길 바란다고 했어. 아주 훌륭한 분이셨어!” 교황의 선서가 떠올라 아르투아렐의 표정이 환해진 것과는 대조적으로 아이메리크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담담하게 말한다. “모든 이에게 축복이라…… 그런 일이 정말 가능할까요?” 아르투아렐이 가능하다고 대답하려는 찰나, 그들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물론 가능하죠! 새 교황님은 위대한 분이시니까요!” 아이메리크와 아르투아렐이 돌아보자, 그곳에는 간소한 차림의 금발 머리 소년이 서 있었다. 아마도 기사의 자제인 듯했다. 비록 같은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귀족들의 대화에 끼어든 소년은 허리 숙여 예를 표했다. 하지만 이내 참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새 교황님은 작년에 저희 교실에 와 주셨어요. 기사의 자녀들이 좋은 기사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며 기도도 해주시고…… 굉장히 다정하고 좋은 분이에요. 저는 교황님을 지키는 기사가 되고 싶어요!” 소년이 말하는 교실이란, 정교회가 주최하는 자선 활동을 가리킨다. 열의를 담아 이야기하는 소년과 마음이 통한 것 같아 아르투아렐은 친근감을 느꼈다. 하지만 아이메리크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열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그때, 한 기사가 다가와 평민 소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발루르당의 아들! 네 아버지가 찾으신다!” 금발 머리 소년은 등을 펴고 다시 한번 크게 허리 숙여 예를 표하더니 아르투아렐과 아이메리크에게 작별을 고하고 자리를 떴다. “저도 이만 가야겠군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아르투아렐 공.” 자신이 이름을 가르쳐 준 적이 있는지 기억을 되짚는 아르투아렐에게 등을 돌리고, 아이메리크도 자리를 떴다. 아이메리크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권모술수가 판치는 귀족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주변 인물들을 끊임없이 통찰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남다른 노력으로 꾸준히 문무를 단련했다는 사실이 훗날 밝혀진다. 십수 년 후, 그는 신전기사단의 총장 자리에까지 올랐기에―― “아르투아렐 경. 다들 벌써 돌아갔는데 왜 그러고 있나?” 남아 있던 아이메리크의 목소리에 아르투아렐은 정신을 차렸다. 생각에 잠긴 사이에 의원들은 투표를 마치고 귀가한 모양이다. 몇 번 전장에서 함께 싸웠던 인연으로 두 사람은 서로 깊게 신뢰하게 되어, 지금은 허물없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비어 있는 옥좌를 보니 문득 토르당 7세의 취임식이 생각났습니다. 아이메리크 의장, 당신과 처음 이야기를 나눈 것도 그때였죠.” 아르투아렐의 말에 ‘그렇군’ 하고 맞장구를 치던 아이메리크는 옥좌를 바라보다가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 와 돌이켜 보면 씁쓸한 과거이긴 하네만.” 어린 시절의 추억은 두 사람을 수다스럽게 만들었다. 아르투아렐은 가슴에 품고 있던 속내를 아이메리크에게 털어놓았다. “저 또한…… 이슈가르드 정교, 그리고 교황을 순수하게 믿었던 과거가 그리우면서도 한심하기도 하고, 복잡한 심경입니다. 당시에 품었던 긍지가 거짓 역사 위에 만들어진 가짜였다는 걸 생각하면 말입니다.” “역사의 은폐는 정교가 저지른 가장 큰 죄다. 정치 개혁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란 것은 분명하나 믿었던 정교에 배신당한 사람들의 마음속 상처는 오래도록 아물지 않겠지.” 아르투아렐은 김리트 황야에서 야영하던 중에 아이메리크가 해 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과거, 교황의 모략을 추궁하던 그에게 토르당 7세는 되려 되물었다고 한다. “자그마치 천 년을 내려온 역사와 신앙을, 백성들이 그리 쉽게 잊어버리리라 생각하는가?”라고. 그의 그 질문은 지금도 가시처럼 가슴에 박혀 남아 있다고 한다. 나도, 그 사람도, 성도의 백성도 모두 정교를 쉽게 잊을 수 없겠지. 잊을 수 없으니 이렇게 계속 고민하고 있고. 하지만…… 아르투아렐이 말을 이으려고 하자 아이메리크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과거와 현재의 민심을 받아들여 그 앞에 펼쳐진 미래를 걷고 싶다.” 빈 옥좌를 바라보며 속내를 털어놓는 아이메리크에게 아르투아렐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석양이 그들의 등을 비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