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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널판타지14 못다 한 이야기

효월의 종언을 기다리며, 등장인물들의 미처 말하지 못했던 특별한 이야기들을 공개합니다!

「멜위브의 죄」

우가마로 무장광산에서 열린 평화 협상이 성공리에 끝나고, 오랫동안 대립해 온 림사 로민사와 코볼드족 사이에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큰 업적을 거두고 제독실로 돌아온 멜위브 블루피쉰은 아끼는 총을 손질하며 처음으로 이 두 자루의 총을 쏘았던 때를 떠올렸다. 때는 제6성력 1562년. 당시, 림사 로민사에서는 크리스탈을 수송하는 상선이 사하긴족에게 습격당하는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크리스탈은 산업의 핵심이기에 유통이 막히면 림사 로민사 용광로의 불은 꺼지고 장인들은 망치를 내려놓아야 한다. 이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나선 대해적이 있었으니 바로 엄청난 세력을 자랑하는 해적, 은모래 일가의 전 두령인 ‘블루피스’였다. 그는 몇 년 전 두령의 자리를 딸인 멜위브에게 물려준 몸이었지만, 여전히 큰 영향력이 있어 딸과 부하들에게 해상 경계 임무에 임하도록 호령을 내렸다. 의리가 두터운 아버지를 존경하던 멜위브는 명령에 따라 매일같이 로타노 해에 배를 띄웠다. 그러던 어느 날, 멜위브의 배인 ‘라이블리 호’가 링크펄을 통해 구조 신호를 포착했다. 발신처는 상선 ‘오리온 호’. 아니나 다를까 사하긴족의 습격을 받았다고 한다. 아버지에게 맡겨 놓은 주력 선단과는 거리가 떨어져 있어 멜위브는 홀로 현장 해역으로 달려가는 길을 택했다. 일반적으로 해상전에서는 사하긴족이 유리하지만, 멜위브의 과감한 지휘와 그녀의 오른팔인 부단장 로렌스의 백발백중 저격 덕에 큰 피해 없이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그야말로 완승이었다. 이제 ‘오리온 호’를 항구까지 호송하면 임무는 끝이다. 하지만 상황은 그리 평탄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총격 속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사하긴족이 화물 속 크리스탈을 이용해서 야만신―― 수신 리바이어선을 소환한 것이다. 해룡보다 훨씬 더 거대한 수신을 눈앞에 두고, 멜위브는 형세가 뒤집혔음을 깨달았다. 바다 위에서 인간이 도망칠 곳이란 없다. 유일한 발판인 배가 부서진다면 더는 손쓸 도리가 없다. 첫 일격에 ‘라이블리 호’의 용골은 부러졌고, 몇 분 지나지 않아 결국 침몰했다. 남은 선원들은 자신들이 구조한 ‘오리온 호’로 올라탔지만 모두 전의를 잃은 상태였다. 멜위브 역시 예외는 아니었으나 자신들을 향해 점점 다가오는 선박의 그림자가 그녀의 의식을 다시 전투로 돌리게 했다. 블루피스가 주력 선단을 이끌고 지원하러 온 것이다. 20세가 채 되기도 전에 멜위브의 부선장이 된 중원 부족 청년 로렌스는 태양처럼 눈부신 금발을 손가락으로 쓸어 넘기며 안도한 듯 숨을 내쉬었다. “두목이 와 줬군…… 휴우, 목숨은 건졌어……” 딸이 젊을 때부터 두령으로서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일찌감치 자리에서 물러난 블루피스였지만, 은모래 일가의 진짜 수장이 누구인지 멜위브는 실감했다. 야만신을 상대로 한 싸움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해적들은 수많은 희생을 치른 끝에 수신 리바이어선을 쫓아냈다. 당시, 해적 중에서 가장 큰 세력을 과시했던 은모래 일가를 총동원했음에도 수신 리바이어선을 완전히 토벌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사람들에게 야만신의 위력을 각인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블루피스가 일부 선원을 데리고 자취를 감춘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후의 일이었다. 명목상 두령은 멜위브였기 때문에 남은 선원들이 곧바로 분열되지는 않았으나 모두가 동요하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흉흉한 일은 계속 이어졌다. 또다시 림사 로민사의 상선이 습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게다가 이번 습격의 주체는 사하긴족이 아니라 인간 해적이었다. 상선을 습격한 해적들은 자신들 스스로 ‘바다뱀의 혀’라고 칭하며, 화물인 크리스탈을 모조리 약탈했고 저항하는 자는 가차 없이 살해했다고 한다. 이후로도 ‘바다뱀의 혀’의 상선 습격은 계속되었다. 그들이 빼앗은 크리스탈이 사하긴족의 산란지로 흘러 들어간다는 정보가 여러 뱃사람을 통해 들어왔다. 심지어 증언에 따르면 ‘바다뱀의 혀’를 이끄는 사람이 자취를 감췄던 블루피스라는 것이다. 림사 로민사의 유명한 해적이 사하긴족과 내통하고 있었다는 충격적인 정보는 하루아침에 바다의 도시 구석구석까지 퍼졌다. 그로부터 며칠 후. 림사 로민사의 항구에서 일출을 기다리지 않고 출항하려는 배 한 척이 있었다. 갑판을 꿰뚫는 차가운 밤바람을 맞으며 멜위브와 몇몇 부하들은 출항을 준비하고 있었다. 생각이 많은 듯, 표정이 경직되어 있다. 블루피스가 사하긴족에 가담한 것이 밝혀진 후로, 은모래 일가는 역적의 일당으로 취급받으며 자유를 잃었다. 역적의 딸이 된 멜위브를 향한 시선은 더욱 가혹했다. 새벽을 앞둔 어둠이라도 틈타지 않으면 배를 타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나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나타났다.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멜위브가 돌아보자 거구의 루가딘족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철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그 가면이 그가 유명한 해적왕 ‘안개수염’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버지 블루피스와 적대하던 시기도 있던 전설적인 대해적. 역적의 딸을 벌하러 왔다고 생각한 멜위브가 방어 자세를 취했다. “블루피스를 다시 데리고 오기 위해 가는 건가?” 안개수염의 목소리는 철가면에 막혀 흐릿하게 들렸지만, 어딘가 신비한 온기가 느껴졌다. “아니…… 죽이러 간다.” 뜻밖의 대답이었는지 말문이 막힌 듯한 표정을 보이던 안개수염은 쥐어짜듯이 이렇게 말했다. “그래…… 아비를 되찾으러 갈 계획이었다면 힘으로라도 막을까 했다. 네 각오가 그렇다면 이걸 가져가라……” 안개수염은 자신이 아끼는 두 자루의 단총을 내밀었다. 그 의도를 가늠하기 어려워 멜위브가 물었다. “좋은 총인 건 알겠다만 이걸 왜 나에게……?” “나와 블루피스 같은 늙은 해적의 시대는 곧 끝난다. 녀석도 그걸 알고 있기에 젊은 너에게 두령 자리를 넘겼겠지. 네가 녀석을 쏘겠다면, 그 각오를 나도 짊어지게 해다오.” 안개수염이 아버지와 어떤 관계였는지 멜위브는 알 도리가 없었으나, 아버지의 목숨을 거두는 죄를 함께 짊어지자는 그의 말에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그녀는 배를 띄웠다. 두 자루의 단총을 가슴에 품고―― 해가 뜰 무렵, 멜위브를 태운 배는 바다뱀의 혀가 본거지로 삼고 있던 작은 섬에 상륙했다. 요격에 나선 자 중에 사하긴족이 섞여 있는 것이, 블루피스가 이끄는 바다뱀의 혀가 사하긴족과 내통했다는 증거였다. 멜위브는 안개수염에게 받은 두 자루의 단총을 양손에 쥐고, 적들을 차례차례 쏘아 맞혔다. 적군의 대부분은 한때 부하였고, 어릴 적부터 함께했던 동료이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아무리 발버둥 쳐도 수적으로 열세인 처지. 몇 안 되는 부하가 차례차례 쓰러지고 멜위브 또한 점차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여기서 끝인가…… 죽음을 각오한 그녀를 구한 것은 한 발의 총탄이었다. 뒤돌아본 그곳에는 림사 로민사에 남아 있어야 하는 부단장 로렌스가 있었다. 자신이 쓰러지면 두령으로서 은모래 일가를 이끌 사람이기에 말없이 떠났건만. “네가 여긴 어떻게!?” “두령이 앞장서서 판을 벌이는데 안 따라가는 놈이 해적이야?” “그런 것치고는 좀 늦게 온 거 아닌가?” “난 방향치라고. 선창에 숨었다가 나와 보니까 아무도 없더라니까? 길도 없고 지도도 없는 걸 나더러 어쩌라고.” 농담을 주고받으며 멜위브와 로렌스는 절묘한 연계 작전을 펼쳐 적을 소탕해 나갔다. 두 자루의 단총을 쥐고 돌진하는 멜위브를 로렌스가 뛰어난 원거리 저격으로 지원했다. 두 사람이 섬의 중심에 있는 동굴에 도달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블루피스와 재회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은 과거의 흔적도 찾을 수 없을 만큼 비쩍 마른 데다 헝클어진 머리와 수염은 희끗희끗했으며 입은 멍하니 벌리고 있었다. 너무도 변해 버린 모습에 말을 잃은 멜위브와 로렌스에게, 블루피스는 뿌옇게 흐린 유리 같은 눈으로 말을 걸었다. “너희도 우리 ‘바다뱀의 혀’의 일원이 되러 왔나?” 로렌스는 여전히 입을 꾹 다문 멜위브를 슬쩍 보더니, 그녀를 대신해 속내를 떠보려 했다. “두목,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모르겠나, 로렌스? 인간은 신 앞에서 너무나도 무력하다. 하지만 수신님께 충성을 맹세하면 이 바다에서 살아남을 수 있어.” 야만신에 대한 연구가 진행된 요즘이었다면, 이때 블루피스가 신도로 변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을 테고, 그의 명예를 더럽히는 행동에도 동정의 여지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그런 지식이 없었기에 그저 배신자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멜위브는 아버지의 기이한 변화가 그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의 아버지와 대화를 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는 알고 있었지만, 멜위브는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불가능이란 사람이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아버지가 가르쳐 주었지. 바꿔 말하면 가능도 신이 아니라 사람이 만들어내는 것 아닌가!” 하지만 그 말은 통하지 않았다. 블루피스는 마음속 깊이 실망한 듯 답했다. “잘못 키운 것 같군……” 그 이상 대화는 필요하지 않았다. 멜위브가 이곳에 온 목적은 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배신자에게 ‘죽음의 징벌’을 내리기 위해 온 것이다. “다행히 이곳에는 우리뿐이다. 아직 당신에게 해적의 긍지가 남아 있다면 내 결투 신청에 응해라.”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멜위브를 보자 블루피스는 조금 전까지 비열한 미소를 띠고 있던 입술을 굳게 다물고 일어서더니 딸과 등을 맞대고 섰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대답이었다. 참관인은 로렌스 한 명뿐. 보조해 줄 사람도 없는 쓸쓸한 결투다. 아무런 신호도 없이 양측이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간다. 정적에 싸인 동굴 안에 발소리가 울릴 때마다 부녀의 거리가 멀어진다. 조금 전까지 가깝게 느껴졌던 아버지가 지금은 손이 닿지 않는 먼 곳에 있다. 멜위브는 원통했다. 그때, 사하긴족을 확실하게 제거했더라면 야만신은 소환되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도 아버지의 뒤를 따르고 있지 않았을까. 이윽고 두 사람은 동굴 벽 앞에 멈춰 섰고, 결투 신호를 기다렸다. 로렌스는 굳게 쥔 오른손 주먹을 앞으로 내밀고 천천히 폈다. 펼쳐진 손바닥에서 동전 하나가 떨어진다. 동전이 지면에 닿는 순간, 아버지와 딸 중 하나는 죽는다. 혈혈단신이었던 로렌스를 키워 준 사람은 다름 아닌 블루피스였다. 로렌스가 그 은혜를 잊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멜위브 역시 알고 있었다. 그도 아버지나 다름없는 블루피스가 자신의 눈앞에서 죽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로렌스는 멜위브와 함께 아버지의 목숨을 거두는 죄를 짊어지는 길을 선택했다. 그것이 남매처럼 자란 그가 내린 대답이자 삶을 마주하는 자세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동전이 바닥에 떨어지며 경쾌한 금속음이 동굴 안을 울렸다. 순간, 아버지와 딸은 허리의 총에 손을 대고 동시에 몸을 돌렸다. 먼저 방아쇠를 당긴 쪽은 멜위브였다. 총구에서 발사된 탄환은 정확하게 아버지의 왼쪽 가슴을 관통했고―― 방아쇠에 손가락을 건 채로 블루피스는 무너져 내렸다. “멜위브, 로렌스…… 수고를 끼쳤구나…… 뒷일을…… 부탁한다……” 블루피스가 마지막으로 띤 미소는 멜위브가 기억하고 있는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움직이지 않는 블루피스를 내려다보며 로렌스가 입을 열었다. “이걸로 끝난 게 아냐. 아직 야만신의 위협이 남아 있어. 하지만 그저 그런 해적 녀석들 좀 모은다고 놈을 해치울 수 없지.” 그는 주먹을 꽉 쥐고 말을 이었다. “그러니…… 난 전 세계의 실력자를 모아서 야만신을 죽일 용병단을 만들겠어! 두목이 뒷일을 맡긴다고 했으니까……” 입을 꾹 다문 로렌스의 눈이 너는 어쩔 생각이냐고 묻고 있었다. “나는……”
총 손질을 마친 멜위브는 창가에 서서 잔잔한 바다를 바라보았다. 아버지를 죽인 그날의 일을 지금까지 몇 번이나 떠올렸던가.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함께 죄를 짊어져 주었던 두 남자 덕분이었다. 한 사람은 철가면을 벗고 지금도 멜위브를 지지해 주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제7재해 이후, 모습을 못 본 지도 오래되었지만…… 이 바다가 다시 폭풍에 휩쓸리게 된다면 반드시 다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우리는 아버지가 맡긴 뒷일을 책임져야 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