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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널판타지14 못다 한 이야기

칠흑의 반역자편에 등장한 인물들의 미처 말하지 못했던 특별한 이야기들을 공개합니다!

볼레크도르프의 낮잠

옛 성질이 발현된 격세 유전 아마로는 일반 종의 수명을 크게 뛰어넘는다. 하지만 오래 살다 보니 노화도 오기 마련. 눈은 침침하고 날개에는 기력이 없다. 볼레크도르프의 총명한 아마로들을 통솔하는 세토 역시 진작에 백 살은 넘긴 몸이라 최근에는 특히나 조는 시간이 늘었다. 오늘도 달콤한 꽃향기가 이끄는 대로 낮잠에 빠져 그리운 꿈을 꾼다. 이곳은 아므 아랭의 도시, 나바스아렝. 강렬한 햇살이 내리쬐는 마을의 한 모퉁이에 앙상하게 마른 어린 아마로가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다. 한창 성장기일 텐데 물과 먹이를 충분히 먹지 못하고 혹사를 당하면 이렇게도 되리라. 뜨거운 돌바닥에 눕고 싶은 자가 어디 있겠냐마는, 목줄이 짐수레에 고정되어 있어 자유롭게 움직이기도 쉽지 않다. 그러니 채찍을 사랑하는 주인님이 돌아올 때까지는 조금이라도 쉬어 두는 게 좋겠다는 것이 이 아마로의 생각이다. 아, 주인님께서 오신다. 거리에 있는 석조 건물의 상점에서 뚱뚱한 흄족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온다. 손에는 남자가 애용하는 채찍이 들려 있다. 도마뱀의 힘줄로 만들어진 저 채찍을 맞으면 정말이지 너무 아프다. 그러니 아무리 피곤해도 명령하는 대로 움직이게 된다. 온다, 온다, 채찍이 온다. 목일까, 어깨일까, 등일까 아니면 엉덩이일까. 얼굴은 안 때리면 좋겠다. 어린 아마로가 눈을 감고 마음의 준비를 하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평소 같았으면 제일 먼저 날아왔을 채찍이 잠잠하다. 눈을 떠보고 깜짝 놀랐다. 아직 소년이라고 해도 될 만한 어린 남자가 몸에 어울리지도 않는 커다란 쇠도끼를 짊어지고 눈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삐쩍 마른 아마로와 뚱뚱한 남자 사이에 끼어든 것이다. “찾았다, 라문스 씨! 아니, 비취 여우라고 불러야 하나?” 이것이 훗날 ‘세토’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 아마로와 모험가 아르버트의 첫 만남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서로를 동료라고 인정하기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 수개월 전, 나바스아렝의 시장에서 가짜 보석이 발견되었다. 숙련된 감정사의 눈도 속일 정도로 정교한 상품인 탓에 한바탕 난리가 났다. 신뢰와 명예가 훼손된 나바스아렝의 보석상 조합은 이 베일에 싸인 사기꾼을 ‘비취 여우’라고 부르며 막대한 현상금을 걸었다. 하지만 그를 잡기는 쉽지 않았다. 수많은 모험가들이 전국 각지에서 현상금을 노리고 모여들었으나, 그들이 찾은 건 ‘여우’가 시장에 유통시킨 모조품뿐이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 종지부를 찍은 2인조가 있었으니 바로 신출내기 모험가 아르버트와 라미트였다. 이들은 전직 왕국 기사이자 숙련된 모험가인 브란덴의 협력을 얻어 환영 마법을 교묘하게 이용한 모조품 제작의 비밀을 밝혀내고, 결국엔 라문스라는 남자를 잡았다. 세 사람은 획득한 상금을 똑같이 나눴다 ―― 하기야 술고래인 브란덴에게 큰돈을 쥐어주면 하룻밤 만에 술값으로 다 사라질 것이 뻔했다. 몇 차례에 걸쳐서 주겠다는 라미트의 제안을 떨떠름하게 받아들이면서, 브란덴은 정식으로 이 일행에 합류하게 되지만 이건 또 다른 이야기라 할 것이다. 그럼 생전 처음 손에 쥐게 된 큰돈을 아르버트는 어디에 사용했을까? 놀랍게도 그는 그 앙상하게 마른 아마로를 구입했다. 라문스의 소유물이었던 아마로가 나바스아렝 당국에 압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주저 없이 협상을 진행한 결과다. 아르버트가 데리고 온 삐쩍 마른 아마로는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힘없이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보고 브란덴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이봐, 애송이, 제정신이야? 그 삐쩍 마른 녀석을 어쩌자고 데려와. 긴 여행은 물론이고 성곽 둘레나 제대로 돌 수 있겠어? 그렇다고 구워 먹자니 뼈만 있어서 먹을 것도 없겠고.” 무시당하고 있는 것을 알았는지, 아마로는 불만스럽다는 듯 콧소리를 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르버트는 아마로의 턱 밑을 쓰다듬으며 시원스럽게 말했다. “저 아저씨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세토. 누가 영리한 너를 잡아먹게 놔둔대? 우리 둘이서 브란덴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자!” 어째서 아르버트는 세토라고 이름 붙인 이 아마로에게 빠지게 되었을까. 물론 너무도 사람 좋은 그이기에, 가치가 없다며 살처분되기 직전이었던 세토를 불쌍히 여긴 것도 한 가지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세토의 재능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콜루시아 근해의 작은 섬마을에서 태어난 아르버트는 산촌이었던 고향에 비슷한 또래 친구가 없어 동물들을 친구 삼아 산을 뛰놀며 자랐다. 유일한 가족이었던 할아버지는 그에게 온갖 동물들을 다루는 법을 가르쳤고, 아마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세토가 틈날 때마다 주저앉았던 건 예전 주인의 가혹한 처사를 견디기 위해 조금이라도 체력을 보존하기 위한 지혜라는 사실을.
“자, 해봐, 세토!” 아르버트가 손 휘파람을 불어 신호를 보내면 세토는 호박석 벌판의 거친 땅바닥에 몸을 힘없이 엎드린다. 그러면 아르버트는 브란덴과 라미트를 데리고 근처 바위터에 몸을 숨긴다. 행상인들을 위협하는 코요테 떼를 토벌해 달라는 의뢰를 받고 세토를 미끼로 써서 유인해내려는 그들의 작전이다. “먹을 것도 없는 저 삐쩍 마른 아마로를 미끼로 써서 잘될지 모르겠네…….” 큰 덩치를 한껏 웅크리며 브란덴은 못 미더운 듯 말을 내뱉었다. 정작 세토는 새로운 주인이 당황스러웠다. 전 주인과는 달리 아르버트는 결코 채찍을 사용하지 않았다. 아니 채찍은커녕 너무나도 다정하다. 먹이와 물도 듬뿍 주는 데다가 털 손질까지 직접 해주었다. 그가 턱 밑을 긁어주면 어쩐지 꿈을 꾸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일까.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더 있었다. 자신에게 여러 재주를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다. 새로운 주인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 기껏 받게 된 좋은 대우를 물거품으로 만들 순 없다. 그래서 나름대로 열심히 기대에 부응했는데…… 세상에, 여기서 산 제물로 바쳐질 줄은 몰랐다. 아아, 역시. 인간은 믿으면 안 돼.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거친 들판에 누워 있으니 정말로 코요테 떼가 나타나는 게 아닌가. 그동안 배불리 먹였던 건 다 이것 때문이었나, 이런 생각까지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세토, 이제 됐어, 이쪽으로 와!” 도끼를 짊어진 아르버트가 바위 그늘에서 뛰쳐나와 맹렬하게 이쪽으로 오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날 버리지는 않을 건가 보다. 세토는 벌떡 일어나 전력을 다해 주인을 향해 뛰었다. 학대를 받은 영향이 아직 남아 있는 세토는 하늘을 날 수 없다. 필사적으로 날개를 퍼덕거리며 뛰는 모습이 너무도 우스꽝스러워 브란덴은 눈물까지 흘리면서 크게 웃었다. “하핫, 말라깽이가 엄청 당황했나 봐!” 또 바보 취급을 받았다는 걸 직감한 세토는 일부러 진로를 변경해 브란덴 쪽으로 돌진하더니 그의 머리 위를 훌쩍 뛰어넘었다. 그러자 세토를 쫓고 있던 코요테 떼가 웃고 있는 거대한 남자를 향해 몰려들었다. “으악, 저 바보 아마로!” 이번에는 브란덴이 당황할 차례였다. 이렇게 행상인 습격범 토벌 의뢰는 성공적으로 끝났고, 보상도 챙겼다. 이후로도 아르버트 일행은 계속해서 마물 토벌 의뢰를 성공시켰다. 세토는 때로는 병약한 미끼를, 때로는 영역을 어지럽히는 도전자를 연기하면서 표적을 유인했다. 호박석 벌판의 주인이라고 불리는 거대 포루스라코스를 토벌할 때도 세토의 명연기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놀랍게도 세토는 포루스라코스 암컷의 우는 소리를 흉내 내는, 아르버트조차도 생각지 못한 재주를 보여주며 신출귀몰하기로 유명한 토벌 대상을 훌륭히 유인해냈다. 상처 입고 도망가는 포루스라코스를 쫓다 둥지에 도착하게 된 일행은 격렬한 전투를 펼친 끝에 그 대상을 토벌할 수 있었다. “둘 다 이것 좀 봐! 돈이 될 것 같지 않아?” 혹서의 황야에서도 절대로 투구를 벗지 않는 드워프족 라미트가 말했다. “우와, 대단한걸. 포루스라코스가 반짝거리는 걸 좋아한다는 게 사실이었구나!” 마른 풀로 만들어진 둥지에는 둥지 주인이 모아놓은 듯한 귀금속이 남아 있었다. 브란덴은 유독 크고 금색으로 빛나는 메달을 집어 들어 태양에 비췄다. “특히 이건…… 나바스아렝 왕가가 전쟁에서 공을 세운 장군에게 주는 훈장이야. 200년 이상은 됐을 거야. 묘지를 파헤쳤거나 습격했던 사람의 소지품이었나 본데…… 아무튼 고물상에 가져가면 상당히 값을 쳐 주겠어!” 만면에 웃음을 띄우며 브란덴이 전리품으로 얻은 메달을 자신의 품속에 넣으려고 하자, 옆에서 아르버트가 재빨리 그것을 낚아챘다. “잠깐, 브란덴. 이 메달은 오늘의 공로자에게 줘야 하지 않을까?” “뭐? 그럼 더더욱 내가 가져 가야지. 그 놈의 강렬한 일격을 방패로 받아내고 목에 검을 꽂은 게 누구였지?” “그건 아저씨가 맞긴 한데, 사실 오늘의 최고 공로자는 훌륭하게 그 놈을 유인해낸 세토 아니겠어?” 아르버트는 주머니에서 가죽 끈을 꺼내어 메달을 꿰고는 그것을 세토의 목에 걸었다. “세토, 넌 자랑스러운 동료야!” 세토는 기세 좋게 콧소리를 냈다. 자랑스럽게, 아주 뿌듯하게―― “후훗, 나도 너에게 메달 주는 건 찬성이야. 브란덴에게 줘 봤자 어차피 내일이면 술값으로 다 나갈 테니까.” 라미트가 웃으니 브란덴도 두 손 두 발 다 들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알았다고! 오늘의 최고 공로상은 세토로 결정! 대단한 아마로라니까, 정말!” 이렇게 세토는 아르버트의 동료로 일행에게 인정받는 존재가 되었다. 이후 아므 아랭에 연달아 마물 토벌에 성공하는 모험가들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들과 만나기 위해 어떤 자가 찾아온다. 바로 미스텔족 사냥꾼 렌다 레이다. 이어서 레이크랜드에서는 명문 귀족 자제의 행방불명 사건에 도전하는 과정에서 은회색 머리칼의 검사 실바를, 다시 방문한 아므 아랭에서는 같은 의뢰를 받은 라이벌인 고독한 마도사 나일베르트를 만나고, 동료로 맞이했다. 동료는 늘어나고 여행은 계속되었다. 힘들기도 했고, 괴롭고 슬픈 일도 있었지만 그래도 참 즐거운 시간이었다. 낮잠에서 깬 세토는 목에 걸린 메달의 무게를 느끼고 작게 콧소리를 냈다. 한번은 잃어버렸던 메달이다. 마을에 접근해온 떠돌이 죄식자를 격퇴할 때, 몸이 성장한 탓에 맞지 않게 된 가죽 끈이 끊어져 호수 밑바닥에 가라앉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그 사람이 찾아다 주었다. 지금 이렇게 목에 걸려 있는 가죽 끈은 리다 란에 있는 요정들에게 부탁해 새로 마련한 것인데 ―― 아무래도 요정들이 꿈꾸는 주문을 걸어 놓았나 보다. 그러니 그리운 꿈을 꾼 것이겠지. 세토는 또다시 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늙은 몸으로 세계를 누빌 수는 없겠지만 호수 건너편까지는 날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 꿈을 꾸게 해준 “꿈맺음” 요정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러 가자. 세토는 날개를 활짝 펼쳤다. 자, 날아보자, 그때처럼 ―― 나이 든 아마로의 작은 모험을 시작해 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