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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널판타지14 못다 한 이야기

칠흑의 반역자편에 등장한 인물들의 미처 말하지 못했던 특별한 이야기들을 공개합니다!

영광의 낙양

이것은 아직 노르브란트의 하늘이 정체된 빛으로 가득 채워지기 전의 일. 높이 달린 창문에서 비추는 달빛을 받으며 열심히 실험용 유리병을 들여다보는 자가 있었다. 이곳 푀부트 왕국의 주요 민족인 드란족도, 갈젠트족도 아니다. 응 모우족 젊은이 베크 러그다. ‘혼’의 신비를 규명하고자 하는 그에게 왕가에서는 그뤼네스리히트 성 한구석에 따로 방을 마련해주었고, 그는 그곳에 틀어박혀 분초를 아껴가며 연구에 몰두했다. 이 날 역시 새벽을 향하고 있는 시간임에도 실험대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그곳에 한 손님이 찾아왔다. 푀부트 왕국의 제2왕녀 폴디아다. 호기심 왕성하고 붙임성 좋은 이 드란족 소녀는 휘황찬란한 왕성에 있으면서 은둔자처럼 살고 있는 베크 러그가 몹시 마음에 들었는지 수시로 찾아와서는 주변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늘어놓고 돌아가곤 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오늘은 전혀 입을 열지 않는다. 이상하게 생각한 베크 러그가 돌아보니 드물게 어두운 표정이다. “피아, 혹시 무슨 우울한 일이라도 있어?” 베크 러그는 친밀하게 애칭을 부르며 말을 걸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흔들리기만 할 뿐이었다. “하하, 언니인 솔디아 공주가 세 가지 국보를 물려받은 것 때문이구나? 제2왕녀인 넌 그게 썩 달갑지 않은 것이고.” 푀부트 왕국에서는 쌍두 이리를 본뜬 세 개의 장신구를 국보로 지정하고 그것을 대대로 왕위 계승자에게 물려준다. 바로 며칠 전 제1왕녀인 솔디아가 그것을 물려받았고, 이것은 사실상 후계자 결정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인간 세계의 사정에 어두운 베크 러그라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아니야! 항상 공명정대하고 당당한 언니가 왕위를 물려받는 게 당연해! 내 소원은 언니를 곁에서 계속 보좌하는 거란 말이야…… 그런데 아버지가 혼담을……!” 어깨까지 들썩이며 눈물을 글썽이는 폴디아를 보고 베크 러그는 자신의 무심함을 후회했다. 인간들은 왕위를 욕심 내는 법이라고, 동료들은 그렇게 말했지만 아무래도 그녀는 예외인가 보다. 자, 그럼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하나, 베크 러그가 생각에 잠겨 있자니 또 새로운 손님이 찾아왔다. 하얀색 로브를 입은 마른 체격의 드란족, 궁정 마도사 타드리크다. 그는 허락도 받지 않고 방 안으로 들어오더니 과장된 동작을 섞으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아, 폴디아 님,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오나 아버님께서는 솔디아 공주님께 왕위를 물려준다는 사실을 국내외에 확실히 보여주기 위해 제2왕녀인 당신을 타국으로 시집보내 왕가를 벗어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갑작스러운 방문자에 놀라면서도 폴디아는 대답했다. “……물론 알고 있어.” 아버지는 그 누구보다도 국가의 안녕을 가장 생각하신다는 것을…… 하지만……!” “그럼요, 그럼요, 폴디아 님의 마음은 충분히 알고 말고요. 원치 않는 혼인이 행복할 리 없다는 것을 아버님도 이해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이 타드리크가 왕가의 상담사로서 담판을 지어 보겠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지원군을 얻은 폴디아는 본래의 밝은 성격으로 돌아왔다. “어머, 정말? 고마워, 타드리크…… 정말 얼마나 든든한지 모르겠어! 그에 비해 베크 러그는…… 위로의 말 한 마디도 안 하더라니까?” 장난스럽게 웃는 그녀를 향해 베크 러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며칠 뒤. 베크 러그의 연구실에 찾아온 폴디아는 그 뒤로 혼담이 어떻게 되었는지 이야기해주었다. 타드리크의 설득 덕분에 롤드리크 왕은 그녀의 혼담을 취소했다고 한다. 하지만 왕은 그녀가 궁정에 머물기 위해서는 제2왕녀라는 신분을 버리고 궁정 마도사가 되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고 한다. “하지만 난 마법에 재능이 없어……. 그래서 말인데 너한테 의논하고 싶은 게 있어. 전에 말한 적 있었잖아. 혼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사람의 내면에 잠들어 있는 재능을 깨우는 비술을 발견했다고……” 매달리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듯이 베크 러그는 눈을 감고 고개를 좌우로 가로저었다. “안 돼, 피아. 그건 아직 연구가 끝나지 않았어. 육체의 생명력을 일시적으로 활성화시키는 비약을 완성하기는 했지만, 마법의 재능에 눈뜨게 하려면 혼에 돌이킬 수 없는 영향이 미쳐.” 베크 러그는 위험성을 애절하게 설명했다. 혼은 섬세한 것이며 자칫 잘못하면 잠들어 있는 재능을 각성시키지도 못하고 육체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부탁할게. 베크 러그. 난 가족과 함께 살고 싶어……!” 궁정 마도사가 되지 못하면 사랑하는 언니를 보좌할 수도 없고, 너와 이렇게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단 말이야! 그렇게는 되고 싶지 않아, 절대로……!” 베크 러그의 마음도 다르지 않았다. 성 안에서 유일하게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에게 보여준 다정한 마음씨에 보답할 길이 있다면 그건 그녀의 유일한 소원을 들어주는 일이 아닐까? 고뇌 끝에 그는 탐탁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 폴디아는 마술 시련을 통과했고 재능을 인정받아 정식으로 궁정 마도사가 되었다. 신분은 달라졌지만 폴디아는 그 후로도 연구실에 자주 찾아와 끝도 없는 담소를 나누곤 했다.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볼 때마다 위험한 비술을 가르치고 말았다는 후회는 조금씩 옅어졌다. “그나저나 손거울 호수에 미지의 마물이 나타났다면서? 피아도 조심하도록 해.” 당대 롤드리크 왕이 왕좌에 앉은 뒤로 수십 년 동안 푀부트 왕국은 큰 전란에 휘말리는 일 없이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며칠 전 어디선가 침입한 마물이 양치기를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왕국 기사의 활약으로 마물은 격퇴했지만 주민들의 동요가 가라앉기도 전에 계속해서 비슷한 사건이 발생해 혼란은 가중되고 있었다. 계속해서 조사를 해보니 마물은 외부에서 침입한 것이 아니라 국내에 거주하던 주민이 마물로 변이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주민들은 내일이면 이웃집 사람이 마물로 변하는 건 아닐까 서로를 의심하며 두려움은 더욱 커져만 갔다. 일이 이렇게 되자 롤드리크 왕은 궁정 마도사들에게도 왕국 기사단과 함께 수사에 참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두 조직을 통솔하는 자가 없다 보니 오히려 현장은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때 혜성처럼 나타나 사태를 호전시킨 자가 있었으니, 바로 제1왕녀 솔디아였다. “언니는 정말 대단하다니까? 갈젠트족 왕국 기사들을 이끌고 최전선에서 앞장서서 싸운다고!” 폴디아가 흥분하며 이야기를 하는 것도 당연하다. 차기 국왕으로 인정받은 솔디아가 진두지휘를 하기 시작하면서, 평소 대립 관계에 있던 왕국 기사들과 궁정 마도사들이 결속했고 그 결과 마물과의 전투도 유리하게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원인규명은 난항을 겪고 있었지만 경계 태세는 강화되었고, 주민이 마물로 변이해도 신속한 대응을 통해 피해 확대를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베크 러그의 마음은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다. 인간이 마물로 변하는 현상에 짐작 가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폴디아에게 가르쳤던 비술. 그것을 응용하면 이론상으로는 혼의 형태를 근본적으로 개조해 인간을 마물처럼 흉측한 모습으로 바꿀 수 있었다. 하지만 천진난만한 피아가 비술을 악용했을 리가 없다. 베크 러그는 의심을 거두듯이 연구에 몰두했다. 그러다 수사를 지휘하던 솔디아가 마물의 습격을 받아 부상을 입고 그 책임을 물어 호위 역할을 하던 왕국 기사가 추방되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하지만 그 소문을 들었을 때에도 베크 러그는 귀를 막고 연구실에 계속 틀어박혀 있었다. 범인이 누구든 언젠가 누군가는 밝혀내 처벌할 것이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이 세상은 그렇게 균형을 맞춰가고 있을 거라 믿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날도 베크 러그는 자신의 연구실에서 실험용 유리병을 흔들고 있었다. 갑자기 문이 부서질 듯이 거칠게 열리는가 싶더니 누군가가 뛰어들어왔다. 왕가의 시중을 들고 있는 응 모우족 슬 오울이다. “큰일이야, 베크 러그! 마물화 사건의 흑막이 판명되었어!” 드디어 기다리던 날이 왔으나, 그것은 어떤 의미로는 두려워하던 날이기도 했다. 최대한 냉정한 모습을 가장하며 베크 러그는 누구냐고 물었다. “궁정 마도사 타드리크야! 모험가들이 그자가 이번 사건을 일으켰다는 것을 밝혀냈어!” 폴디아의 이름이 나오지 않은 사실에 베크 러그는 마음속 깊이 안도했다. “난 지금부터 모험가들과 함께 타드리크를 쫓을 거야! 이미 성 내부는 마물 천지야! 이 방에서 절대로 나오면 안 돼!” 방을 뛰어나가는 슬 오울의 등에 대고 베크 러그가 물었다. “피아는…… 폴디아는 어디 있지?” “아직 자기 방에 있을 테지만, 걱정 안 해도 될 거야! 모험가 중 한 명에게 보호를 부탁해 놨거든!” 떠나는 동족을 바라보며 베크 러그는 친구의 신변이 걱정되었다. 며칠 전 사건을 수사하러 온 모험가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는 했다. 다들 좋은 사람들이라 정보 수집에 도움을 주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온전히 그들만 믿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는 안절부절못하다 결국 연구실을 뒤로했다. 하지만 싸움에 능하지 않아, 마물이 보이면 어두운 곳에 몸을 숨기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다 결국 마물에게 들켜 정신없이 도망치고 있을 때, 어떤 자가 앞에 끼어들었다. “비켜라! 강아지!” 야수와 같은 마물을 단칼에 베어버린 건 엘프족 검사였다. 은회색 머리카락을 뒤로 꽉 묶은 그녀는 볼품없이 쓰러진 베크 러그를 차가운 시선으로 흘깃 쳐다보더니 일으켜 세우지도 않고 뛰어서 사라졌다. 저자는 아르버트의 동료―― 그렇다면 슬 오울이 보호를 부탁했다는 모험가가 저 여인인가. 강아지로 불렸다는 분노조차 잊고 필사적으로 뒤를 쫓으니 그녀는 폴디아의 방문을 발로 차려고 하고 있지 않은가. “무례하다!” 분개한 베크 러그는 엘프족 검사를 밀어젖히고 열린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그곳에 있었다. 할 말을 잃은 베크 러그의 등 뒤로 검을 든 검사가 다가섰다. “쳇…… 늦었군…… 마지막 자비다, 한번에……” 마물의 피로 더럽혀진 검의 날이 폴디아에게 향하는 것을 보고 베크 러그는 정신을 차렸다. “멈춰라, 제발 멈춰줘!” “어리석은 소리 마라…… 이 녀석의 왼쪽 팔을 봐, 변이가 시작되고 있다고!” 그 사실은 베크 러그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결코 인정할 수 없었다. 친구를 죽이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부탁이다, 난 혼 연구가야! 그녀를 구할 수 있어…… 그러니 적어도 목숨만은……!” 변이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다리에 매달리는 베크 러그를 보며 엘프족 검사는 한숨을 쉬었다. “그럼 사람을 공격하기 전에 어딘가에 유폐할 수밖에 없어. 여긴 성이니까 지하 감옥 정도는 있겠지?” 결국 검사는 투덜거리면서도 폴디아를 기절시키고 지하 감옥에 가두는 일까지 도와주었다. 역할이 끝나자마자 흑막 타드리크를 잡으러 간 동료들에게 달려갔지만―― 베크 러그는 어스름한 독방에서 친구가 눈을 뜨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눈을 뜬 그녀는 인간의 모습이긴 했지만, 마음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해 있었다. “타드리크 이놈, 날 배신하다니……! 언니를 죽이고 나면 날 여왕으로 추대해주겠다고 약속했는데! 그것 때문에 베크 러그를 구슬려서 비술을 손에 넣었건만……!” 눈앞에 있는 베크 러그가 보이지 않는 것일까. 폴디아는 일심불란하게 자신의 피를 이용해 벽에 뭔가를 휘갈겨 쓰기 시작했다. “언니만, 언니만 없었더라면……! 난 언제까지나 가족과 함께 있을 수 있었어……! 솔디아만 없었더라면!!!!” 잠시 멍하니 있던 베크 러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그 가족 중에 솔디아 공주는 없는 거야? 피아! 넌 누구보다도 언니를 사랑하고 존경했잖아……!” 그러자 폴디아는 빙글 뒤로 돌더니 눈을 크게 떴다. 잊고 있던 무언가가 생각난 듯이. “그래…… 난 가족과……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언니와…… 이상하네, 왜 잊고 있었지……” 힘없이 주저앉은 폴디아의 몸에서 검은 아지랑이가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타드리크의 저주 때문에 그녀의 마음이 묶여 있었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미안해, 베크 러그…… 내 친구…… 마지막으로…… 꼭…… 사과하고 싶었어…………” 한줄기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렀다. 그 한 방울이 차가운 돌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폴디아의 육체는 완전히 마물로 변했다. 그날 이후로 베크 러그는 자취를 감췄다. 일련의 사건으로 차기 국왕을 잃은 푀부트 왕국은 빛의 범람 후 죄식자 무리의 습격에 대항하지 못하고 결국 국가를 포기한다. 그뤼네스리히트 성이 버려진 뒤, 한 왕국 기사가 과거의 제2왕녀를 애처롭게 여겨 독방을 열어주었다는 일화도 전해지지만, 그 뒤로 폴디아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