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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천의 이슈가르드

못다 한 이야기

파이널판타지14: 창천의 이슈가르드편에 등장한 인물들의 뜻밖의 만남, 그리고 스토리에서 미처 말하지 못했던 마음을 담은 특별한 이야기를 공개합니다.

알리제 르베유르는 ‘할아버지의 손녀라는 것’이 자랑스럽다. 할아버지......, 즉, 제7재해에서 에오르제아를 구한 현자 루이수아는 샬레이안에서도 유서 깊은 명문가인 르베유르 가 출신이다. 알리제는 그의 손녀로서 스스로 자신을 갈고 닦아왔고, 학생 때에는 뛰어난 성적을 받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한편, 주위에서는 명가 자녀답지 않은 왈가닥 성격과 뛰어난 오빠에 대한 저항심에서 생겨난 ‘약간의’ 독설을 비난하기도 했지만, 굳이 따지자면 본보기로 삼은 루이수아조차 격식을 따지지 않는 익살스러운 사람이었다. 그 정도는 눈감아주었으면 한다. 그날, 알리제는 에오르제아를 돌아보던 중이었다. 오빠나 시종은 물론, 모험가도 동행하지 않고, 혼자서 하는 여행. 할아버지가 목숨 걸고 지킨 땅을 자기자신의 눈으로 보고 싶어서 시작한 여행이었다. 당시 다날란 지방을 돌아다니는 중이었는데 낮은 특히 더웠다. 목을 축이기 위해 별수 없이 길거리에 있는 술집에 들어가자, “웃기지 마!” 라는 남자의 욕설이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쪽을 보니, 커다란 남자가 수수한 여행복 차림의 소녀에게 덤벼들고 있었다. 소녀는 의연한 태도로 남자에게 말대꾸를 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도리어 거슬리는지 남자는 당장에라도 주먹을 휘두를 기세였다. 알리제는 한숨을 쉬었다. 우악스러운 남자도, 유치한 싸움도 질색이다. 하지만 동시에 할아버지라면 이를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워 죽겠는데 기운도 좋네. 알아서 다물래? 아님, 닥치게 해줄까?” 알리제의 매서운 목소리에 노발대발하던 남자도, 화를 돋우던 소녀도 얼빠진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그것이 알리제와 행상인 소녀 에밀리의 만남이었다.

‘일방적으로 말도 안 되는 거래를 걸어온 남자’를 쫓아낼 배짱과 실력을 갖췄다는 에밀리의 말에, 알리제는 잠시 그녀가 소속된 상단의 호위를 맡게 되었다. 마침 전임 모험가와의 계약이 끝나서 새로운 호위를 구하던 참이었다고 했다. 그 상단은 평범하게 도시와 지방 마을을 오가며 장사를 했지만, 곳곳의 지름길을 활용해서 누구보다도 빠르다는 것이 장점이었다. 그들의 유랑 생활, 주고받는 대화, 사용하는 도구. 알리제에게는 모든 것이 신선했다. 이를 눈치 챈 에밀리가 설명을 해주기에 다 안다는 표정으로 끄덕이기는 했지만......, 에밀리가 즐거워 보이는 미소를 짓는 걸 보니, 흥미진진했다는 게 들통난 모양인지도 모른다. 어쩐지 창피해져서 대화를 끝내는 쪽은 항상 알리제였다. 그런 생활이 며칠 동안 계속되었다. 상단은 송곳 봉우리 산기슭에 있는 마을에 도착했다. 울다하 도시에 비할 수는 없지만, 꽤나 활기가 넘치는 마을이라는 것은 오가는 사람들의 숫자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알리제는 마을로 오는 도중에 고작해야 길을 막은 염소 떼를 쫓는 활약을 했을 뿐이다. 그래도 모든 짐마차가 무사히 도착했을 때에는, 무심결에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앞으로 호위를 해주는 사람에게는 좀 더 상냥하게 대해주자고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잠시 후, 장사 준비로 분주한 사람들을 바라보던 알리제를 향해 에밀리가 달려왔다. “알리제, 오늘은 엄청 바쁠 것 같아. 너도 도와줘!” “뭐? 말도 안 돼! 내가 가게를 어떻게 도와......!”

거부할 틈도 주지 않고, 에밀리는 알리제의 손을 잡더니 동료들이 상품을 나르고 있는 광장으로 끌고 갔다. 간이 노점처럼 변해버린 그곳에는 상단이 도착하기를 손꼽아 기다리던 마을 주민들이 벌써 모여들어서, 늘어놓은 상품을 이것저것 구경하고 있었다. 알리제는 깜짝 놀라 살짝 뒷걸음질쳤다. 쌍둥이 오빠였더라면 호의적인 미소를 지으며 금방 저 무리의 중심에 섰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곳에 있는 사람은 오빠와는 대조적으로 고고하게 살아온 여동생이다. 에밀리가 그대로 물러나려는 알리제를 붙잡았다. “가격은 전에 얘기해줬으니 알지? 그러니까 괜찮아!” “괜찮다니......, 무책임하잖아! 에밀리, 얘!?” 따지는 알리제의 목소리가 허공에 묻히고 에밀리는 곧바로 손님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아연실색한 알리제의 눈앞에 중년 여성이 “이거 얼마죠?” 하고 옷감을 들이댔다. 알리제는 무심결에 옷감과 여성을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그 옆에서 에밀리가 아주 잠시 바라보더니,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포기하는 수밖에 없나 보다. 알리제는 점점 더 신나게 달아오르는 손님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알리제 일행이 최선을 다한 덕에 장사는 성황리에 끝났고, 그날 밤은 마을 구석에 있는 낡은 여관에서 묵게 되었다. 알리제는 좁은 개인실에 놓인 두 개의 침대 중 한 쪽에 앉아, 이전에 울다하에서 구입한 주술 관련 책을 읽고 있었다. 하루를 마무리하며 책을 읽고, 일기 대신에 배운 것을 적는 것은, 그녀가 학생일 때부터 계속해 오던 일이다. 책 속에 시험해볼 만한 주술이 있으면, 다음 날 아침에 조금 일찍 일어나 연습해 보곤 했다. 하지만 오늘 밤은 익숙지 않은 일을 하는 바람에 피곤에 휩싸여 독서를 하려 해도 몇 줄 읽지 못하고 눈꺼풀이 감겨 왔다. 졸면서 고개를 몇 번 꾸벅였을 무렵, 같은 방을 쓰는 에밀리가 내일 여행 일정 상담을 마치고 돌아왔다. 놀라서 깬 알리제가 무릎에서 떨어질 뻔한 책을 황급히 잡는 모습을 보고,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오늘 함께 하자고 해서 미안해.” “아냐, 괜찮아. .......나름대로 재미있었어.” 에밀리는 비어 있는 침대에 걸터앉고 알리제를 보며 차분하게 중얼거렸다. “매일 공부를 하다니 대단하다. 오빠한테 질 수 없다고 했던가?” “처음에는 그랬지. 하지만 할아버지와 함께 하면서 자연스럽게 습관이 됐어.” “후후, 할아버지를 정말로 좋아하는구나. 하지만 알리제, 피곤할 때는 푹 자야 해.” 에밀리는 천천히 일어나서 알리제 무릎 위에 있는 책을 집어 들고는 책갈피를 꽂아 덮었다. “잠깐, 아직......”이라며 저지하려는 알리제를 개의치 않고, 에밀리는 책을 짐 더미 위에 올려놓고는 자신도 졸음이 오는지 기지개를 켰다. “알리제, 나머지는 내일 해. 우린 오늘도 죽어라 일하고, 열심히 살았어. 난생 처음으로 장사까지 해봤잖아. 독서를 조금밖에 못했다고 날달 신도......, 분명 네 할아버지도 나무라지 않으실 거야.” 알리제는 그 말을 천천히 음미했다. 여느 때 같으면 그런 건 변명에 불과하다고 딱 잘라 말했을 그 말이 따뜻하게 마음을 녹여 갔다. 그 다정함이 어쩐지 그리웠다. 옆에서 에밀리가 램프로 손을 뻗었다. 그녀는 평소처럼 꽃이 핀 듯이 웃으며 “잘 자”라고 말하고 불을 껐다. 그것이 에밀리와 보낸 마지막 밤이었다.

희미한 빛에 알리제의 눈이 떠졌다. 침대 위로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니 이곳은 그리다니아 여관 개인실이라는 것이 생각났다. 동이 트려던 참이었다....... 꿈을 꾼 모양이다. 에밀리와 함께 여행한 것은 꽤 오래 전 일이다. 그녀는 이제 없다....... 이 세상 어디를 찾아보아도. 마을에서 장사를 한 다음 날, 다음 마을을 향해 떠난 상단은 다날란에서는 보기 드문 호우를 만나게 되었다. 시야가 나빠 평소보다 짐마차의 간격을 벌리고, 깎아 내린 듯한 절벽으로 둘러싸인 지름길을 가던 때였다. 굉음과 함께 토사가 밀려 내려와 뒤쪽의 일행을 집어삼켰다. 에밀리가 타고 있던 짐마차 또한 차가운 흙더미 속으로 사라졌다. 다행히 앞쪽에 있어서 재난을 면했던 알리제는 살아남은 사람들을 다음 마을까지 호위하고, 그곳에서 상단과 헤어졌다. 현실을 실감하지 못한 상태로 그 자리를 뒤로 한 채, 멀리서 딱 한 번 상단을 돌아보았다. 줄어든 짐마차를 보니 갑자기 가슴이 미어지며 눈물이 차 올랐다. 그 후 알리제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만남과 헤어짐을 겪을 때마다 작은 가슴에 추억을 쌓으며 알리제는 여행을 계속하고 있다. 당면한 목적은 최근에 풍문으로 들은 ‘새벽이 아닌 또 다른 영웅들’에 대한 조사를 하는 것이다. 거리에서는 이슈가르드 소동만 화제가 되고 있지만, 그 뒷면에 야만신에 얽힌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다고 한다면....... 언젠가 오빠 일행의 발목을 잡을지도 모른다. 알리제는 침대에서 내려와, 창문을 열고 날이 밝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오늘도 열심히 살자. 눈동자에 그 각오를 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