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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천의 이슈가르드

못다 한 이야기

파이널판타지14: 창천의 이슈가르드편에 등장한 인물들의 뜻밖의 만남, 그리고 스토리에서 미처 말하지 못했던 마음을 담은 특별한 이야기를 공개합니다.

'친구 그리고 용'

이른 아침 내린 비로 축축해진 건초 더미가 새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 연기를 들이마실 때마다 숨이 턱 막히는 듯했지만 소년은 죽을 힘을 다해 계속 달렸다. 제발 무사하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그 바람은 맥없이 무너졌다. 힘겹게 도착한 집 마당에서 불에 탄 부모님의 시체를 보았기 때문이리라. 적어도 남동생만은 살아남았기를 바랐던 실낱 같은 희망마저 반쯤 무너진 집에 들어서자마자 사라지고 말았다. 그곳에 있던 것은 바닥에 누워있는 동생의 모습뿐……. 소년은 동생 곁으로 달려가 무릎을 꿇었다. 상반신은 상처 하나 없이, 마치 곤히 잠들어 있는 듯 보였다. 그러나 끔찍하게도 하반신은 무너진 대들보에 부스러져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눈처럼 새하얀 동생의 머릿결을 어루만지던 소년은 폭포 같은 눈물을 흘리며, 저주했다. 고향 '펀데일'을 덮친 사룡 '니드호그'를…… 양을 몰러 나갔다가 혼자만 살아남아버린 자신의 운명을……. '이봐, 살아있으면 어서 일어나라고!' 웬 남자가 부르는 소리에 이끌리듯이 에스티니앙은 꿈에서 깨어났다. '알베리크……?' 눈앞에 흐릿하게 보이는 남자의 모습에 에스티니앙은 반사적으로 자기 스승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아무래도 사람을 잘못 본 모양이다. '알베리크 경 말인가? 보아하니 아직 꿈에서 덜 깬 모양이군. 이거라도 마시고 정신 차려' 양의 위장으로 만든 물통에 담긴 물을 억지로 삼킨 뒤에야 에스티니앙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검은 머리의 젊은 남자가 땅에 엎드려 있던 에스티니앙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걱정스러운 듯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이는 서로 엇비슷해 보였다…… 20대 전후. 철회색 사슬갑옷으로 보아 자신과 같은 '신전기사단' 사람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에스티니앙은 오직 용을 잡을 수 있는 힘을 기르기 위해 밤낮으로 창술 훈련만 해온 탓에 신전기사가 된 뒤로도 다른 단원들과 어울리지 않고 늘 홀로 지내왔기 때문이다. '고맙다, 신세를 졌군……' 그렇게 말은 꺼냈지만, 결국 말문이 막혔다. '이거 참, 같은 부대 사람인데 아직 내 이름도 못 외웠나? 내 이름은 아이메리크다. 우리 둘 다 이런 상황에서 용케 살아남았군'

그 말을 들은 에스티니앙은 주위를 둘러보다 숨이 멎는 듯했다. 아직 불씨가 남아있는 목초지에 열 명이 넘는 기사가 쓰러져있었다. 거센 불길에 휩싸였는지 모두 살갗이 불타 있었고 갑옷은 그을음투성이였다. 그 광경을 보고 나서야 이제껏 벌어진 일들이 떠올랐다. 드래곤족을 봤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른 아침 부대 동료들과 함께 중앙저지의 영원호수 주변을 살펴보러 나섰던 일. 그리고 완만한 목초지 들어서자마자 바위 뒤에 숨어있던 거대한 드래곤에게 습격을 받아 드래곤이 내뿜는 불길에 휩싸였던 일. 과감히 맞서 싸우다가 어찌어찌 창을 찔러 넣어 겨우 쫓아낸 일까지는 기억이 나지만 아무래도 연기를 너무 많이 마신 탓에 정신을 잃은 모양이다. 그 꿈을 꾼 것도 어쩌면 목초가 탈 때 나는 이 독특한 냄새 때문이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자 숨을 거둔 동료들 주검에 부모님의 모습이 겹치며 강렬한 증오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 끓어올랐다. 부모님…… 그리고 동생의 원수인 드래곤족을 단 한 마리도 살려두지 않으리라. '옛날부터 목숨줄 하나는 질겨서 말이지…...' 자리에서 일어난 에스티니앙은 눈앞이 어지러웠지만 동료들의 주검 사이에서 창 한 자루를 집어 들고 발걸음을 옮겼다. '이봐, 성도는 반대쪽이라고!‘ 자신을 '아이메리크'라고 소개했던 검은 머리 기사가 당황한 기색으로 불러 세웠다. '기껏 목숨을 건졌으니 넌 성도로 돌아가라……. 난 반드시 그 놈 숨통을 끊어놓겠어‘ '혼자서 드래곤을 잡겠다고? 막무가내로군! 게다가 쫓아가려 해 봤자 우릴 덮친 드래곤이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잖아?' 에스티니앙은 뒤를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정신을 잃기 전에 그 놈 배때기에 창을 처박아줬지. 봐, 목초지에 피를 흘리면서 간 흔적이다…… 이걸 따라가면 분명 잡을 수 있을 거다' 이 말을 남기고, 에스티니앙은 다시 홀로 걷기 시작했다. 끔찍한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한 빚은 반드시 갚아주리라.

몇 시간이나 추적한 끝에, 에스티니앙은 마침내 사냥감을 찾아냈다. 상처 입은 드래곤은 몸을 숨기려고 깊은 골짜기 속 동굴로 달아난 듯했다. '내 체력도 넉넉하진 않으니…… 서둘러 끝장내야겠군!' 굳게 다짐하듯 중얼거린 에스티니앙은 창을 들고 뛰쳐나갔다. 드래곤이 습격을 알아채고 고개를 들었을 때, 이미 거리는 충분히 좁혀진 뒤였다. 드래곤이 화염을 내뿜은 순간 에스티니앙은 드래곤의 품속으로 파고들며 불길을 피해 창을 꽂아 넣었다. 전쟁강철로 만든 창 끝이 드래곤의 날개를 찢었다. 고막을 찢을 듯한 울부짖음이 동굴 안에 울려 퍼졌다. '크하하…… 이제 날아서 달아나진 못할 거다. 애당초 이런 좁은 동굴 안에선 마음껏 날아다니지도 못하겠지만 말이야!' 그러나 자랑스러운 날개를 다친 탓에 미쳐 날뛰는 드래곤에게는 애초에 달아날 마음이 없는 모양이었다. 드래곤은 아픔과 분노로 몸을 떨며 에스티니앙을 덮쳐왔다. 어두컴컴한 동굴 안에서 젊은 신전기사와 상처 입은 드래곤이 서로 맞붙었다. 에스티니앙이 휘두른 창이 용의 비늘을 찌른 듯싶다가도, 드래곤이 내뿜은 불꽃이 사슬갑옷을 새빨갛게 달궜다. 서로 체력만 소비하며 엎치락뒤치락하던 전세는 우연한 계기로 갑작스레 바뀌었다. 에스티니앙은 장애물이 많은 동굴 지형을 활용하여 몇 번이나 불꽃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불꽃이 암벽의 일부를 녹인 탓에, 결국 뜨거운 열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진 것이다. 온 신경을 드래곤에게 집중하고 있던 에스티니앙은 갑자기 머리 위에서 쏟아진 돌덩이를 미처 깨닫지 못했다. '쳇!' 치명상을 입을 만큼 커다란 바위는 겨우 피했으나, 연거푸 날아오는 드래곤의 꼬리는 피할 수가 없었다. 온몸을 찌르는 듯한 충격에 에스티니앙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동굴 벽으로 내팽개쳐졌다. 눈앞이 점점 흐려졌지만 의식은 오히려 또렷했다. 드래곤이 한발 한발 다가오는 진동이 느껴짐에도 불구하고, 머리를 부딪힌 탓인지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여기까진가……' 겨우겨우 창을 쥔 손끝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을 때, 이미 드래곤은 그의 눈앞에 서 있었다. 커다란 분노를 불꽃에 담아 내뿜으려는 듯 크게 숨을 들이마시는 드래곤의 폐가 점점 부풀어 오르는 것을 에스티니앙은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그 화염은 에스티니앙을 불태우지 못했다. 갑자기 드래곤의 머리가 뒤로 젖혀지며 엉뚱한 방향으로 불꽃이 날아갔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에스티니앙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으으으으으어어어엇!' 우렁찬 외침과 함께 에스티니앙은 있는 힘을 모두 끌어 모아 뛰어올랐다. 마치, 그 옛날 자신을 구해준 '푸른 용기사'를 보는 듯 완벽한 도약이었다. 가장 높은 지점에서 몸을 비틀어 창 끝에 모든 체중을 싣고, 스스로 창과 하나가 되어 떨어졌다.

그리하여 에스티니앙은 처음으로 용을 잡는 데 성공했다. 쓰러져 누워있는 거대한 드래곤의 눈에는 화살 한 발이 깊이 박혀있었다. 멍하니 죽은 드래곤을 바라보고 있자, 손에 활을 든 남자가 다가왔다. '너는…… 성도로 돌아간 줄 알았더니……' '멍청한 소리 마.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혼자 드래곤을 쫓아간 동료를 내버려둘 만큼 야박하진 않으니까' '고맙다…… 신세를 졌군……' 무뚝뚝하게 고마움을 표하는 에스티니앙을 바라보며, 검은 머리 청년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걸로 두 번째 빚을 졌으니 성도에 돌아가면 술이라도 한잔 대접받아야겠군. 그리고 내 이름은 아이메리크다. 자네 친구가 될 사람 이름 정도는 외워두라고' 이번엔 에스티니앙이 쓴웃음을 지을 차례였다.

창천의 이슈가르드, 못다 한 이야기 2화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