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월의 종언 못다 한 이야기

패치 V6.0 효월의 종언 메인 스토리의 내용 중 일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직 메인 스토리를 완료하지 못한 분께서는 주의 부탁 드립니다.

「삶이란」

이 세상에 용서만큼 잔혹한 일은 없다. 그것은 누군가의 이해 범주 안에 들어가 버린다는 뜻이다. ‘괜찮아’ ‘신경 쓰지 마’ ‘피곤해서 그런 거야’ ‘언제든 의논해’ 그렇게 존재가 용서받을수록 죽음까지 각오한 마음은 하찮은 것이 된다. 비탄은 둥글어지고 증오는 가시가 꺾여 수많은 팔이 부드럽게 밀어 넣는 대로 틀에 끼워진다. 저항을 시도해 본다. 흔해 빠진 마음으로 바뀌기 전에 기력을 쥐어짜 내게 뻗은 팔에 손톱을 세운다. 하지만 팔의 주인들은 이쪽을 내려다보며 ‘그렇구나’하고 너그럽게 미소 지을 뿐이다. 또 용서받는다. 손톱자국조차 어디에도 남지 않는다. ――이번에야말로 난 용서받지 못할 수 있을까. 휘페르보레아 조물원, 머나먼 상공과 이어지는 창조 천공층에 서서 헤르메스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아래층에서 긴급 사태를 알리는 경보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미리 기록된 음성이 창조 생물이 탈출했을 우려가 있으며 경계 태세로 전환한다는 경고를 반복해서 내보내고 있다. 지금 조물원에는 둔화 마법이 걸려 있어 직원과 관찰자를 제외하고 능력이 제한되어 있다. 그렇게 만든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헤르메스다. 변신하여 평소보다 두 배쯤 커진 손으로 조물원에 깔린 에테르 망을 건드린다. 기존에 규정된 술식에 따라 에테르 망에 간섭하자 새로 열리는 감옥이 허공에 빛으로 기록되었다. 해방된 창조 생물들은 다가오는 침입자들에게 덤벼들 것이다. 그들이 공격을 받아넘기면서 생물들을 정중하게 감옥으로 돌려보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당연히 맞서 싸울 것이다. 창조 생물의 생명을 존중하는 헤르메스는 그렇게 배제된 개체는 틀림없는 희생자이며, 자신의 행위가 살육이나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도저히 선량하다고는 할 수 없다. 옳은 일도 아니다. 이런 짓을 하고 싶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스스로 싸우는 것과 생태를 숙지한 실험체를 자극하는 것만이, 수적으로도 힘으로도 우월한 그들을 바로 그 자리에서 방해할 수 있는 방법이다. 어쨌든 진심으로 맞서 싸우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사람은 별에 흐르는 피라는 말이 있듯, 같은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사람끼리는 변론으로 다투는 일 말고 서로 부딪힐 일이 없었다. 헤르메스 역시 이런 식으로 실력을 행사해 누군가를 배척하려는 행위는 시도조차 한 적이 없기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불안함이 맹렬하게 복받쳐 올라 지금이라도 이성의 끈을 놓아버릴 것만 같았다. 에테르 망을 건드린 자의 정보가 마법으로 허공에 계속 그려진다. 아니나 다를까 침입자들은 창조 생물을 처치하면서 헤르메스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다. 새로운 감옥을 열고 새로운 희생을 낳으면서, 창조 생물들과 싸우는 침입자 중 한 명에 대해 생각한다. 처음에는 자신을 아젬의 사역마라고 소개했던, 미래에서 온 이방인. 지금 이 시대의 문명이 멸망한 뒤에 새롭게 태어난 인류. 엘피스의 꽃을 어둡게 물들이면서도 미소를 짓던 인물에 대해서. 그날, 초저녁의 어스름 속에서 엿본 것은 다정함도 관용도 아니라 강인함이었다.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여기까지 도달했다는 것을,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보여주고 있었다. 그와 같은 강인함을 가질 수 있을까, 이 순간 헤르메스는 다시 한번 그 미소를 떠올리며 자신을 채찍질한다. 내게 그런 강인함이 있다면 아무리 힘든 일이 있다 해도――죄 없는 생명의 피로 얼룩져 돌이킬 수 없는 결말을 맞게 된다 해도, 가장 소중한 마음만큼은 버리지 않을 것이다. “메테이온, 네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어.” 뒤돌아보면 파란 소녀가 서 있다. 시선은 헤르메스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지만 그 무엇도 보고 있지 않다. 이전의 그녀에게서는 상상조차 안 될 만큼 생기 없는 모습을 보니 가슴속에 불안과는 다른 고통이 느껴진다. 그런데도 공유 의식과의 접속이 조금은 안정되었는지, 옮겨왔을 때 헤르메스가 전달한 ‘조금만 기다려줘’라는 요구를 따라주고 있다. 앞서 레테 해에서 받은 보고를 통해, 아이테리스 이외의 지역에 사는 지적 생명체가 참혹한 상황에 놓여 있음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이 생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메테이온이 받았을 ‘대답’도 이 별의 주민이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심각한 내용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시간이 필요하다. 이곳의 상식에 비추지 않고, 하물며 미래가 어떻게 될 거라는 결과만으로 생각하지도 않고, 그저 자신의 질문과 돌아온 대답. 그것과 마주할 시간이. 헤르메스는 한층 더 견고한 열쇠를 해제하고 창조 생물 평가실에 라돈 왕을 풀었다. 지금까지 희생된 생명의 무게가 죄의 무게가 되어 하나씩 그를 짓눌러오고 있다. 여기서 침입자들을 붙잡아 두지 않으면 다음에는 헤르메스가 직접 싸우게 될 것이고, 그러면 더 큰 죄로 처벌받을 것이다. 그렇게 하라지――헤르메스는 희미하게 웃었다. 용서받아 정해진 형태 속으로 돌아가는 것이 훨씬 더 두렵다. 나의 의문, 그리고 그것을 위해 메테이온과 함께 거듭해온 시행착오가 흔적도 없이 ‘정상’의 범주에 맞춰지는 일만큼은 인정할 수 없었다. “너를 날려보낸 사람으로서, 네가 최선을 다해 날았던 걸 의미 없이 만들지는 않을 거야.” 헤르메스는 괴이한 거구의 모습으로 메테이온 앞에 무릎을 꿇었다. 맹수도 길들일 수 있도록 설계한 다부진 손으로는 늘 그랬던 것처럼 그녀를 어루만질 수 없었다. 그 대신 날개 색과 똑같은 파란색 눈동자를 바라보면, 그 안에 지금에 이르기까지 지나온 날들이 비칠 것만 같았다.

이를테면 처음으로 그 파란색을 떠올렸던 날의 기억. 잠에서 깬 헤르메스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찌 된 일인지, 자신의 방 침대가 아니라 아나그노리시스 천측원의 빈방에 누워 있는 것이 아닌가. 취침 전의 모호한 기억을 잠에서 덜 깬 머리로 더듬고 있는데, 마침 동료인 에우안테가 찾아왔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천측원 한 구석에서 쓰러져 있던 헤르메스를 우선 이리로 옮겨왔다고 설명해주었다. 상황을 이해하고 나자 헤르메스는 민망함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미안……오랫동안 생각해왔던 사역마 이데아가 완성 직전이거든. 그래서 휴식도 잊고……너무 열중하다 보니……” 별을 건너는 창조 생물을 만드는 것은 그의 염원이었다. ‘자기 의지가 있는 엔텔레케이아'의 형태로 만들겠다는 구상까지는 했지만, 그 뒤로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전례도 없다 보니 설계가 너무나도 어려웠다. 주목적이 타행성 생명체와의 교류인 이상, 단순히 뒤나미스를 동력으로 삼는 기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 밖에도 지적 생명체를 탐지하는 능력, 행성과 행성을 단시간에 이동하는 술식도 마련해야 했다. 그렇게 지지부진하던 작업이 얼마 전, 드디어 완성에 가까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에우안테는 움츠러든 헤르메스에게 쓴웃음을 짓고는 적어도 식사는 제대로 하라며 과일이 든 바구니를 내밀었다. “그나저나 완성 직전이라는 걸 보니, 외형 디자인은 해결이 됐나 보네. 너, 항상 거기서 막히잖아?” 바구니를 받아 들던 헤르메스가 어색하게 움직임을 멈춘다. 그녀가 지적한 대로 창조 생물의 외형을 생각하는 일은 헤르메스가 가장 어려워하는 공정이었다. 유일하고 절대적인 존재로 여겨지는 인간의 용모라면 타인과 차이가 없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그 밖의 생물에게는 별을 아름답게 수놓기 위해 고유한 외형을 줘야 했기 때문이다. 그 유명한 환상 생물 창조의 대가, 라하브레아 경은 장식의 세세한 부분까지 세련된 미를 추구한다고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헤르메스는 뭘 어떻게 해야 ‘아름다움’이 생기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존재가 복잡한 만큼, 외형은 소박하게 만들고 싶어. 새의 형태라면 내가 구조를 잘 이해하고 있고, 능력과의 상성도 나쁘지 않을 거야. 그리고 교류에 도움이 되도록 인간과 비슷한 형태로도 변할 수 있게……어떻게든……” “그건 디자인 이전의 문제잖아. 뭔가 더 생각한 거 없어? 외형의 특징이나 어떤 인상으로 만들고 싶다든가.” 헤르메스는 대답할 말이 없어 깊은 생각에 빠졌다. 타 행성의 생명체가 어떤 외형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일지 모르는 이상, 본인의 감각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뭔가 하나라도 참고가 될 만한 것이 없을지 어수선한 머릿속을 닥치는 대로 뒤져 본다. 우주나 별에 대한 것. 뒤나미스의 반짝임. 새가 하늘을 나는 모습…… “아, 그래, 색깔은 파란색이 좋겠어. 나와 멀리 있는 별들을 이어주는 색, 엘피스 하늘의 파란색 말이야.” 생각한 것을 그대로 말한다. 에우안테는 몇 번 눈을 반짝거리더니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괜찮네’라고 했다. 그날 이후, 그녀와 이야기를 들은 동료들이 디자인 자료를 떠안기고 특별 강의까지 해주기를 여러 번, 능력 설계가 끝난 시기보다 조금 늦게, 별을 건너는 창조 생물은 드디어 명확한 형태를 갖췄다. 그 생물을 처음 창조하던 순간을 헤르메스는 잊지 못한다. 이데아를 따라 주의 깊게 마력을 엮으니 빛 속에 한 마리 새가 생겼다. 정신이 번쩍 들 만큼 선명한, 하늘과 똑같은 파란색에 날개 끝 쪽을 향해 검은색이 섞여 있는 모습은 마치 창조 천공층에서 바라보는 별과 우주의 경계와 닮아 있었다. 하늘을 날면 긴 꽁지깃이 하늘에 선을 그려 마치 유성의 꼬리처럼 보일 것이다. “메테이온.” 이 이름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소리를 내어 부르면 행복이 마음에 차올랐다. 외형이 제대로 디자인된 건지 마지막까지 자신이 없었지만, 눈앞의 존재는 확연히 아름다웠기에 헤르메스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둘의 우주 탐색이 시작되었다. 메테이온이 분신을 만들어내어――각각 따로 행동하기 때문에 ‘자매들’이라 부르지만, 획득한 정보를 정기적으로 공유 의식에 통합한다는 구조를 생각하면 역시 분신이라는 인식에 가까울 것이다――우주에서의 시험 비행을 계속했다. 결과는 최악은 아니었지만 좋지도 않았다. 메테이온의 능력 자체는 목적을 달성하기에 충분했으나 실제로 날아보니 문제가 속출했다. “앗!” 어느 날 밤, 직무 후에 시험 비행을 재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메테이온이 소리를 질렀다. 별들을 바라보던 헤르메스가 시선을 아래로 옮기니 구두로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사람 모습을 하고 있던 그녀가 크게 눈을 뜬 채로 굳어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을 새도 없이 그녀의 몸이 무언가에 강하게 맞은 것처럼 뒤로 넘어갔고, 그는 반사적으로 끌어안아 간신히 다치는 것을 막았다. 하지만 그녀는 싸늘한 시체처럼 경직된 채, 불러도 좀처럼 대답하지 않았다. 얼마나 불렀을까, 겨우 흐읍 하고 날카롭게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나더니 그녀의 몸에 시간이 흘러들었다. 동시에 머리칼 사이로 들여다보이는 장식깃이 크게 부풀어 올라 심한 오한을 느끼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위로하듯 어깨를 쓰다듬으며 진정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팔에 안긴 그녀의 입에서 안타까운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실패……자매, 또 사라졌어……!”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해 예측은 했지만 헤르메스는 할 말을 잃었다. 한편 메테이온은 가볍게 일어서더니 이번 실패의 경위를 더듬더듬 보고하기 시작했다. 뒤나미스를 동력으로 삼는 메테이온은 자신을 구성하는 에테르를 극한까지 줄일 수 있어 환경의 영향을 대부분 받지 않는다. 뜨겁게 불타는 별도, 심지까지 얼어붙은 별도, 농밀한 유독가스로 뒤덮인 별도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가령 그런 환경을 ‘뜨겁다’거나 ‘춥다’, ‘괴롭다’라고 느끼는 생명체가 있는 경우에는 비슷한 감각을 갖게 되지만, 애초에 생명체는 극단적으로 자기와 안 맞는 토지에 살고 있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녀는, 뒤나미스의 움직임에는 적잖이 영향을 받는다. 에테르가 짙은 아이테리스에서는 강한 마음의 힘으로 겨우 작용했던 뒤나미스가 우주 공간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형태로 작용하는 경우가 있어 그녀를 크게 현혹하고 있었다. 어떤 별에서는 ‘별 자체’가 뒤나미스를 조종하고 있었다. 사람이 감정을 드러내는 것처럼 대지가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사람이 인식할 수 있는 ‘사고’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지만. 또 뒤나미스가 폭풍우처럼 엉망으로 작용하는 우주 영역도 있었다. 그곳의 중심에는 별바다와 비슷한 에테르 웅덩이가 있어 그곳에 쌓인 기억들이 그 폭풍우를 만들어내고 있는 듯했다. 메테이온은 지적 생명체를 수색하기 위해 뒤나미스의 움직임을 따라가기 때문에 그런 장소로 빨려 들어가면 힘의 급류에 버티지 못하고 소멸해 버렸다. 이번에도 그런 경우인 모양이다. “그래도, 괜찮아! 어떤 곳이 안 되는지, 점점, 알 것 같아. 틀리지 않으면, 지적 생명체 있는 별, 갈 수 있어!” “그야 그렇겠지만……” 의욕적인 메테이온과는 대조적으로 헤르메스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시행착오를 계속한다면 앞으로 몇 개의 분신을 더 소멸시키게 될까. 비록 그녀의 존재 자체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해도 아까처럼 쓰러지는 모습을 보고 나니 더 마음이 무겁다.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는 헤르메스를, 메테이온이 이상하다는 듯이 들여다본다. 암담한 마음이 전달되지 않도록 마음을 고쳐먹으려는데 갑자기 그녀가 손을 뻗었다. 작은 손바닥이 서투르게, 하지만 거침없이 헤르메스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포기, 안 돼, 대답, 제대로 모으자. 헤르메스 행복하면, 다들 행복해, 그러면 나도 많이 행복해!” 짙은 녹색 머리칼을 마음대로 헝클어뜨린 뒤에야 그녀의 손이 떨어졌다. 남은 것은 거친 잔디밭같이 되어버린 머리칼과――누가 먼저였는지 모를, 서로의 작은 웃음소리였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앞서간 별들의 대답을 듣자. 이 세상이 바뀌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어.” 다시 한번, 이번에는 두 사람이 나란히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본다. 가슴속에는 미래를 향한 부드러운 기대만이 가득했다.

그런 날들은 헤르메스의 힘이 부족한 탓에 끝을 맞이했다. “별들의 대답을 가져오기 전에 메테이온의 공유 의식이 폭주하여 모든 개체가 흔적도 없이 소멸”한 것이다. “그때 생긴 혼란으로 카이로스가 오작동”을 일으켜 “시찰 온 사람들까지 포함해 모두의 머릿속에서 며칠 분의 기억을 날려 버리는 참사”가 발생하고 말았다. 나중에 들은 바에 따르면, 몇몇 창조 생물의 감옥이 열려 있었고 실험체끼리 싸웠는지 상당수가 소멸해 있었다고 한다. 그것을 보고하던 조물원 직원은 “소장님이라면 혼란 속에서 그들을 풀어줬을지도 모르겠네요” 라며 미소 지었다. 헤르메스는 후회했다. 메테이온을 날려 보낸 것을. 그녀를 창조한 것을. 자신이 의문을 가진 것을. 주변 사람들과 같은 생각을 했더라면 이런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을 텐데, 스스로를 깊이 원망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헤르메스를 용서했다. 기억이 사라진 건 고작 며칠일 뿐, 긴 인생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사소한 시간이다. 메테이온이나 조물원의 창조 생물들이 소멸한 사건도 헤르메스만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필요하면 또 만들면 되니까. 그 의견을 부정할 수 있는 이유가, 이제 헤르메스에겐 없었다. 용서를 받아들인 그는 이후로 수많은 사람과 똑같이 살았다. 추천을 거부하지 않고 14인 위원회에 들어가 별을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지혜를 발휘하고, 세계의 분단과 함께 인생의 끝을 맞이했다. 이 세상에 용서만큼 잔혹한 일은 없다. 그가 필사적으로 남긴 손톱자국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은……것처럼 보였다. 가령 옛 시대의 끝에, 또는 먼 미래에 종말에서 살아남으려 했던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이 하늘을 뚫어지게 응시할 때 분명 떠오를 것이다. 메테이온이 열심히 날아서 가지고 돌아온 절망에, 하나의 생명으로서 정정당당하게 마주하고 싶다는 소망――그 남자가 용서받지 못한 자가 되어 지키고자 했던 가장 소중한 마음만큼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