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페이지 바로가기 게임시작

파이널판타지14 못다 한 이야기

칠흑의 반역자편에 등장한 인물들의 미처 말하지 못했던 특별한 이야기들을 공개합니다!

종막을 바치다

에메트셀크,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의사당 입구에 울려 퍼진다. 들은 이상 어쩔 수 없다. 나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다. 종종걸음으로 다가오는 목소리의 주인은 예상과 다르지 않게 하얀 로브를 입은 다소 몸집이 자그마한 청년이었다. 얼굴에는 14인 위원회임을 나타내는 붉은 가면을 쓰고 있으니…… 누군지 물어볼 것도 없다. 동료인 엘리디부스다. 무슨 일이냐는 듯 시선을 던지자 그는 한숨을 한 번 쉬더니 굉장히 심각한 얼굴로 말을 꺼냈다. “자네는 다음 의제인 화산 건에 대해서 알고 있어?” “아, 그래, 대규모 분화가 머지 않았다는……. 딱히 복잡한 이야기는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14인 위원회에 들어온 보고에 따르면 어떤 외딴 섬에 존재하는 화산에 불속성의 비정상적 활성화――즉 분화의 징후가 확인되었다고 한다. 섬에는 마을 하나와 광대한 농장이 있다. 분화하면 모든 것이 사라질 테지만……그렇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다른 수많은 예와 마찬가지로 ‘그냥 그런 것’이다. 섬의 주민들도 당연한 흐름으로 받아들이고, 원한다면 이주를 시작했을 것이다. 위원회에서도 대응을 검토할 예정이지만 그 이상의 결론이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런 안건을, 그것도 엘리디부스가 나에게 가져오다니――안 좋은 예감이 든다. “사실은 아젬이 그 산으로 가 버렸어. 분화를 막겠다면서.” 그것 봐! 라고 외칠 뻔했지만 미간을 찌푸리며 꾹 참는다. 몇 초 동안 충분히 마음을 가다듬은 뒤 간신히 “……어떻게?”라고 물으며 다음 말을 이었다. 엘리디부스는 여전히 매우 진지한 모습으로 대답한다. ”자네는 불의 정령 이프리타를 알고 있지?” “……그래. 라하브레아가 만들어낸 이데아 중에서도 최고 걸작이지.” 그러자 우직하게 꾹 다물고 있던 엘리디부스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피었다. “맞아, 그건 정말로 멋지지.”진심을 담아 중얼거리는 모습에서 그가 라하브레아를――그리고 동료들을 얼마나 흠모하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평소 같으면 그 모습이 흐뭇하기도, 멋쩍기도 했을 텐데 지금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채고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불의 정령 이프리타는 불속성 에테르를 한데 모아서 만들어내는 환상 생물이다. 그렇다면 아젬이 어떻게 분화를 막으려고 하는지 상상이 간다. 화산에 가득한 불의 힘을 이프리타의 형태로 바꿔서 끌어낸 뒤 다른 장소에서 흩뜨려 버리려는 것――즉 토벌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해내려면 협력자가 한 명 더 필요할 터. 이프리타의 이데아를 아젬에게 건넬 사람 말이다. 그 역할을 할 사람이 라하브레아가 아니라면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명. 모든 이데아를 통솔하는 창조물 관리국. 그곳의 국장이라면 아무리 엄중하게 관리되고 있는 이데아라고 해도 갖고 나올 수 있을 테다. 즐겁다는 듯이 웃음을 띄우며 아젬을 배웅했을 친구의 모습이 뇌리에 떠올라 무심코 가면을 쓴 채 이마를 짚었다. 엘리디부스는 그 행동을 보고 용건이 전달되었다고 이해한 듯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지만, 사태가 커지면 아젬은 또 질책을 받게 될지도 몰라. 자네가 가줘, 에메트셀크.” “어떤 상황인지는 알겠어……. 그런데 괜찮겠나? 조정자 엘리디부스씩이나 되는 자가 그 녀석 편을 들어도.” “그럴 생각은 없어. 하지만 그 화산 건은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고. 그럼 분화를 막고 싶다는 아젬의 의견도 똑같이 존중되어야 해.” 망설임 없이 단호히 말을 하는 그에게 반론도 긍정도 할 수 없어 어깨를 으쓱하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젬은 언젠가 자기 시대의 조정자가 이 마음씨 착한 청년이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참고로 분화를 막고 싶어하는 이유는 들었나?” 자리를 뜨기 전에 그렇게 물으니 엘리디부스는 “아니……”라고 말하며 생각에 잠긴다. 아마도 아젬과의 대화를 신중하게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근거 없이 말하지 않는 것이 그가 조정자가 된 연유다. 그러다 뭔가 생각이 난 듯했다.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든 그는 아주 중대한 사실을 밝히듯이 지긋이 고했다. “그 섬에서 재배되는 포도가 맛있다고…… 분명 그렇게 말했어……. 섭리를 거스르더라도 포도는 존속시켜야 한다고 판단했을지도 몰라……!” “…………그럴지도…… 모르겠네.” 그의 두터운 신뢰를 망가뜨리지 않으려고 가까스로 장단을 맞추면서 나중에 이 두 명의 나쁜 친구에게 설교를 늘어놓으리라 마음먹는다. 그런 복잡한 심중을 알 리 없는 엘리디부스는 또다시 입가에 미소를 띄우더니 “아젬의 견해는 언제나 신선하단 말이야”라며 애정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엘리디부스는 그런 청년이었다. 임무를 충실히 완수하면서 한편으로는 누구보다도 14인 위원회의 동료들을 아끼고 존중하려 했다. 그를 동생처럼 생각했던 자도 적지 않을 것이다. 조디아크를 소환하기로 했을 때 핵이 되기에 가장 적합한 자가 엘리디부스라는 것을 알게 되자 사명감에 불타는 위원들조차 이별을 아쉬워할 정도였다. 그렇기에 그와의 예상치 못한 재회는 우리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조디아크를 별의 의지로 세우고 종말이라는 재앙을 피한 직후. 미래의 방향성을 놓고 사람들의 의견은 크게 갈렸다. 대부분은 새로운 생명과 맞바꾸어 조디아크에게 바쳐진 동포들을 되찾는 일이 최선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새로운 생명에게 별의 미래를 맡겨야 한다는 주장도 뿌리깊게 존재하고 있었다. 더 이상 판단을 미룰 수 없게 되었을 때, 돌연 조디아크에서 ‘무언가’가 떨어져 나왔다. 그것은 잠시 꿈틀거리더니 인간의 형태가 되었다. 깜짝 놀란 주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 입가가 어색하게――하지만 분명하게 웃음을 지었다. “괜, 찮, 아……. 자네들은, 바르게 판단 하고, 바른 길로 가게 될 거야……. 엘리디부스가, 그걸, 도와주지.” 그 뒤로 세기도 싫을 정도로 많은 시간이 흘렀다. 갈레말 제국의 솔 황제라는 임무를 끝낸 나는 차원의 틈에 떠 있는 어스레한 거점에서 오랜만에 긴 잠에 빠지려 하고 있었다. 솔의 육체는 원초세계에 두고 왔으므로 지금은 그저 망령처럼 형태가 없는 존재다. 그렇기에 더욱 아주 먼 옛날, 내가 나였을 때의 모습을 취한다. 이 모습으로 잠들어 있으면, 다른 사람을 연기하던 시간이 다 떨어져 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유지하는 일이 이제 와서 얼마나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차라리 내다 버리는 게 편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도 나머지 두 사람의 원형 상태를 생각하면…… 내가 계속 고집하고 있는 일에, 감상과는 또 다른 이유가 주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에메트셀크, 날 부르는 소리가 울려 겉잠에서 깨어난다. 피곤하니 가만 좀 놔두었으면 싶어 무시하기로 마음을 먹어도, 목소리의 주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와서 또다시 이름을 부른다. 아득히 먼 옛날 자신을 의사당에서 불러 세운 그 목소리…… 그럴 터인데, 전혀 다른 사람처럼 들리는 건 완전히 달라진 태도 때문일까. 아니면 실제로 변질해 버렸기 때문일까……. 아무튼 목소리의 주인――엘리디부스는 옆에 서더니 엄숙하게 고했다. ”라하브레아가 소멸했다.” ――몸을 일으켜 엘리디부스를 쳐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서로를 감싼 긴 침묵이 뒤집히지 않을 사실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아씨엔에게 ‘죽었다’는 끝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그래, ‘소멸했다’는 건―― “알고 있었잖아, 우리는.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엘리디부스의 말을 들으면서 눈을 감고 차오른 숨을 내뱉는다. 그의 말이 맞다. 라하브레아는 오랜 세월에 걸쳐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어쩌면 ‘지나칠’ 정도로. 세계를 오가며 신체를 바꿔 돌진할 때마다 그는 스러져갔다. 최근에는 어둠에 의한 재해를 일으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나아가 그것을 조장하려는 행동조차 보였다. 마치 불꽃 같다고 생각한 것은 과거의 그가 뛰어난 불꽃 환상 생물을 여럿 만들어냈기 때문일까. 불타오르는 불사조, 불의 정령 이프리타…… 당대의 라하브레아가 만든 불꽃은 강하고 아름다웠다. 그렇게 그 자신 또한 늘 불타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것을 재로 만든 후엔 불꽃도 사라져 버리는 것을.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리며 엘리디부스를 살핀다. 유일하게 가면이 덮지 않은 입가는 굳게 다물어져 있어 감정을 읽을 수 없다. 이제는 예전 같이 경애를 드러내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그런 마음 자체가 이제―― “……에메트셀크?” “아, 그래…… 라하브레아 노친네는 자신이 만든 것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야.” “만든, 것……” 말을 되새기는 엘리디부스의 얼굴에 이번에는 곤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하다. 그가 떠올리지 못한다는 것을 내가 알아차림과 동시에, 그 자신도 또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그의 주먹이 허공을 쥐었다. 그는 조정자로서 14인 위원회 앞에 돌아온 이후――인간이 아닌 소원이 자아내는 ‘무언가’가 된 이후로――시대와 함께 변화하며 자신 안에 있어야 할 것을 계속해서 잃어가고 있었다. “……엘리디부스. 여전히 그 크리스탈을 볼 의향은 없는 건가?” 아직 그가 그 자신이고, 라하브레아가 라하브레아였을 무렵, 그들은 각자가 갖고 있는 위원들에 대한 기억을 한데 모아 크리스탈에 담았다. 윤회자를 다시 자리에 앉힐 때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그것을 엘리디부스에게 사용하면 떠오르는 기억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엘리디부스이고 해야 할 일과 그 방법을 기억하고 있어…… 그걸로 충분해. 이것저것 떠올린들 전투를 거듭하다가 또 잃어버리게 될 거야. ……소중한 기억이라면 여러 번 잃어버리지 않게 해줘.” 그걸 원한다면 역시 반론도 긍정도 할 수 없다.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하고 이야기를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전송 마법을 쓰면서 내게 고했다. “지금부터 난 원초세계로 돌아가 라하브레아를 궁지로 몰아넣은 영웅을 처리할 거다.” “알겠어. 뭐, 상대가 ‘영웅’이라면 네 적은 아닐 테지.” “하지만 만일의 경우도 있으니까. 이 위태로운 시대를 빨리 끝내기 위해 그쪽도 활동을 계속해줘.” 아니, 난 좀 쉬고 싶어―― 말을 뱉기 전에 그의 마법이 발동되어 그 모습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와 직접 만난 것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지금 내 마법은 모두 부스러지고. 남은 것은 내 존재뿐이다. 그마저도 무너져, 바람에 날리는 모래처럼 되돌아간다. 이제 숨조차도 쉴 수 없다. 그 정도의 전투였다――그래야만 했다. 나의 모든 것을 걸고 이루고 싶은 소원이었으니까. 몇 번이나 ‘봐’왔듯 에테르가 명계로 흘러 들어간다. 그 흐름 속에서 아주 긴 과거를, 그리고 찰나의 미래를 생각한다. 결말은 내 손을 떠났다. 하지만 배우들은 아직―― 몹시도 기묘한 형태로―― 무대 위에 모여 있다. 그렇다면 조금만 더. 막을 내려야 할 곳은 지금 이곳은 아니리라. 더 이상 형태도 남지 않은 손으로, 그럼에도 손가락을 튕겨 소리를 낸다. ――보시라, 이 이야기의 에필로그를.